몸이 정확히 기억한 내 페이스
53里 달렸지만 時差 불과 9분
무려 1만1000여명이 운집해 저마다 귀한 뜻을 품고 출발신호를 기다렸다. 더러는 완주의 꿈을, 더러는 더 깊은 사랑을, 또 다른 이들은 우정과 건강을 기원했을 것이다. 한글날 아침 7시를 지난 서울시청 앞 잔디 광장. 이날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마라톤대회 ‘2022서울 레이스’가 열린 날이다. 출발을 30분쯤 앞두고 시작된 치어리더들의 참가자 응원 율동과 음악소리가 현란했다. 광장을 꼭 채운 사람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거나 단체로 나왔다. 그들 모두 ‘이게 얼마만의 신나는 만남이고 축제인가?’ 하는 표정들이다.
온 세상을 휩쓴 코로나19 광풍으로 모든 대규모 야외행사들이 금지되는 바람에 각종 마라톤대회도 그동안 중단됐다. 그 바람에 나를 포함한 전국의 '달림이'들이 무려 3년이나 발이 묶였다가 올가을부터 풀렸다.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 참가신청을 했던가보다. 이 아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빽빽이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움이고 축제 같았다.
나도 이 대회에 사위와 함께 참가했다. 나는 하프 코스, 사위는 10km에. 사위는 전날 밤 시청이 가까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이날 아침 일찍 함께 대회장으로 나갔다. 입고나온 옷들을 벗어 물품보관소에 맡긴 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율동하고, 준비운동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나는 여러 차례 마라톤을 했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지만 몇 차례밖에 뛰지 않은 사위는 걱정이 되는 듯 했다. 물론 나도 3년동안 달리지 못한데다 나이도 세 살이나 더 먹어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내빈들의 대회개최 축사가 끝나고 7시30분에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졌다. 참가자들이 한꺼번에 지르는 함성과 내뿜는 열기가 일제히 태평로 거리를 달구었다. 세종대로의 절반을 꽉 매운 굵고 긴 대열의 중간쯤에 섰던 나도 그 군중들과 함께 움직였다. 이날 우리는 서울시청 옆 세종로를 출발, 경복궁 담장을 따라 청와대앞을 지나 다시 출발지를 지나 숭례문까지 갔다. 거기서 소공동 길을 지나 을지로 입구에서 을지로5가 훈련원공원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을지로 입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청계천을 끼고 동쪽으로 고산자교까지 달린 후 되돌아서 광화문의 청계광장 남쪽 무교로에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결국 내가 9km지점을 통과할 무렵부터 가랑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는 4km정도를 달리는 동안 내리다가 그쳤다.
흔히 마라톤은 자신과의 대결이라고들 말한다. 또 그 주로에 삶의 전 과정이 스며있다고도 한다. 나는 이 말을 실감한다. 나는 20여년에 걸쳐 풀코스 39회, 하프코스를 24회 완주한 경험이 있다. 하프코스였든 풀코스였든 느끼는 고통이나 즐거음엔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2시간에서 4시간 반가량을 혼자 달리며 심한 고독과 고통을 인내로 극복해야 한다. 물론 가끔 옆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누고 간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며 잠깐의 휴식도 즐기긴 한다. 그러나 다시 긴 고독과 고통의 길로 달려 들어가야만 한다.
이날도 그랬다. 그냥 앞만보고 달렸다 절대로 뒤돌아 볼 일은 없었다. 가끔씩 연도에서 응원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말없이 달렸다. 나를 앞질러 가려는 사람에겐 길을 비켜주었다. 나보다 빨리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또 내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을 땐 내가 피해서 나갔다. 이날 나는 철처하게 숨이 차지 않고 가슴이 쿵쿵 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갔지만 그들은 나보다 젊고 체력이나 주력이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20km 지점을 통과할 때 만난 여자와 약200m를 함께 달리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 여자는 의료봉사 서비스를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전 구간을 달려왔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간단한 처치를 하면서 전 구간을 달리는 자원봉사자다. 나는 그에게 정말 훌륭한 일을 한다며 인사를 했다. 그 여자는 내 머리카락을 봤는지 나이를 물어보고 오히려 고령인 나의 노익장을 격려해 주었다. 그 여자의 격려에 마지막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나를 앞질러 나갔다.
나는 마라톤대회 때마다 느꼈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 느낌과 다짐들은 구름처럼 사라져버리곤 했다. 느낌은 정말 힘들다는 것, 다시 말해 커다란 고통이었다. 다짐했던 건 절대로 다시 안 뛰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통은 달리는 구간의 약75∼80%를 지나면서 갑자기 약해지기 시작한다. 하프코스는 17km, 풀코스는 30km쯤을 지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결승선을 지나는 순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박수치고 환호해주는 기분을 느낀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는다.
이번에도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며 달렸고, 결승선의 사람들도 나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특히 달리기를 먼저 마친 사위가 동영상으로 촬영해 가족과 주변의 친지들에게 전송까지 해주었다. 이번의 기록은 2시간22분26초. 3년전 이 대회에서 세운 기록보다 정확히 9분3초 늦었다. 나의 최근 마지막 3년의 하프코스 평균기록은 2시간15분 내외였다. 이날의 이 기록은 정말 내 자신이 페이스를 잃지 않고 끝까지 차분히 달린 노력의 산물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더군다나 3년만의 달리기인데도 내 페이스를 내 몸이 정확히 기억해준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러니 내년 봄에 다시 도전하게 되나보다.
또 집에 들어오니 올해 여섯살 난 손녀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받아 온 완주 메달을 목에다 걸고 올림픽 제패한 언니 오빠들 흉내까지 내며 좋아한다. 자기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아빠와 할아버지랑 마라톤을 해서 메달을 따겠단다. 이래서 마라톤은 온가족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축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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