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는 예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기대는 어긋났다.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상당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취사장의 지붕이 슬레이터라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산길을 떠나는 이들의 식사는 간편하고 빨라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원칙에 충실했다. 배낭에 방수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입었다. 나는 비닐로 된 초라한 우의로 비를 가렸다. 그렇지만 효과는 아주 만족했다. 산장주변까지 몰려 온 운무는 시계를 100m도 안되게 했다. 옆에서 취사를 하던 젊은 여인에게 부탁해 사흘째의 출발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아침7시20분에 우리는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닐우의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비록 바람이 불고 습기로 옷이 눅눅해졌지만 발걸음은 새털처럼 느껴진다. 대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리라. 비 오면 비가 좋고 햇볕나면 햇살이 좋은 것이 바로 자연이 주는 행복일 것이다. 해발 1500m가 넘는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을 차례로 지나 10시40분쯤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거리는 6.2km 정도지만 영신봉을 지날 때는 곰이 나타날까 걱정하기도 했다. 산장을 출발하기 전에 영신봉 근처에서 반달곰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있었으니 조심하라는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다. 곰은 없었지만 그곳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다만 비와 안개 때문에 먼 곳의 절경을 선명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세석대피소 취사장에서 물을 길어와 점심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지난날 우리 현대사의 아팠던 한 순간을 이 산속에서 살다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시절에도 이런 대피시설이 있었을까? 그들은 오늘처럼 쏟아지는 비를 어떻게 피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힘든 고난의 길을 가게 했을까? 노고단, 임걸령, 반야봉, 노루목, 삼도봉, 벽소령, 칠선봉 등 험한 준령들을 그들은 바람처럼 넘나들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그들이 오갔던 길을 즐거움 하나로만 가고 있다. 60여년의 시차를 두고 앞선 한 세대는 이념을 위해 목숨 걸고 다녔고 뒤따르는 다른 한 세대는 건강과 마음의 치유를 위해 걷는다.
세석대피소를 나와 조금 걸으니 세석평전이 나온다. 나는 약30년 전에 이 곳을 지나 천왕봉을 올랐었다. 고산지대에 형성된 습지로도 유명한 이 곳은 당시엔 고사목들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몇 그루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교적 수월하게 이어지던 산행길이 평전을 지나면 촛대봉(1703m), 삼신봉(1807m), 연하봉(1651m)이 잇따라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봉우리들을 지날 땐 숨이 턱턱 막히고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코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럴 땐 콧구멍이 더 크거나 하나 더 있으면 좋으련만 어쩌랴. 완급을 조절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었다. 다만 비를 머금어 미끄러울 걸로 예상했던 바위 길은 먼지가 씻겨 내려간 탓인지 오히려 덜 미끄러워 다행이었다. 험산준령을 넘다보니 비바람을 맞았지만 우의 안쪽은 오히려 땀이 나서 더웠다. 모자 차양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빗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고생했지만 빗길에 앞만 보고 달린 덕에 장터목산장에 도착하니 오후2시30분밖에 안됐다. 밥 먹고 쉬는 시간 포함해 7시간 만에 험한 산길 9.6km를 왔으니 빨라도 너무 빨리 왔다. 산장의 입실시간은 6시부터이다. 저녁지어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취사장밖에 나가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쉴 곳도 없다. 몸이 식으니 추위가 엄습해 온다. 커피를 끓여 마셔보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그러나 달리 해 볼 도리가 없어 동동거리며 시간 보내다가 일찍 저녁지어 먹기로 했다. 어느 새 취사장은 비 맞은 사람들로 꽉 찼다. 산장 측에서도 궂은 날씨를 감안해 1시간 빨리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입실하지 않고 먹을거리들을 꺼내 저녁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산행의 마지막 저녁식사라 남은 반찬과 재료들을 모두 꺼냈다. 따뜻한 라면국물과 덥힌 햇반에 한 팩뿐인 소주를 나누어 마시니 몸에 온기가 퍼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술을 너무 적게 준비한 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사실로 나타났다. 우리들 뒤편에서 식사를 하던 젊은 친구들에게 강신정사우가 말을 걸었다. ‘남은 술 있으면 나눠마시자’고 농담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청년들은 소주 한 팩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우리도 고마워서 가져간 육포를 듬뿍 주었다. 휴가 나온 해병대 병사들인 그들은 세석산장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 옆에서 식사하던 한 청년이 먹고 남은 것이라면서 끓는 물에 덥혀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삼겹살 포장육을 주었다. 없던 술에 푸짐한 고기안주까지 합하니 팔진미오후청도 이 맛에 비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청년에게는 강신정사우의 보물인 담배 몇 개비를 나눠주며 감사했다. 이래서 길나서면 샘솟는 인정들을 만난다고 했나보다.
다음날 새벽엔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가 그친다고 해도 안개는 여전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천왕봉 일출을 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내일 아침식사는 조리하지 않는 행동 식(行動 食)으로 결정했다. 만약 일출을 보려면 새벽3시에는 산장을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어젯밤의 그 코골이 장사가 없기를 기대했는데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는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엉뚱한 사단이 우리들의 잠을 방해했다. 함께 입실한 남자 일행 4-5명중 한 사람이 산행 중에 채취한 산나물을 잘 못 먹은 탓에 식중독에 걸린 모양이었다. 큰 소리로 토하고 괴로워하는 바람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결국 산장측이 그 사람을 별실로 데려가고서야 조용해졌다. 지리산 산장에서의 사흘 밤잠은 이처럼 하루도 제대로 잔 날이 없었다.
새벽3시쯤 눈을 떴지만 우리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기상청의 기준으로는 비가 그쳤지만 지리산엔 짙은 안개 속에 가랑비 못지않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출 구경은 불가능해졌다. 아쉬움을 안고 늦잠을 잤다. 그리고 6시10분 산장을 출발해 천왕봉을 향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고봉의 위력은 있었다. 1806m의 제석봉 오르막을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야 했다. 또 천왕봉으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격인 통천문의 가파른 바위틈도 기다시피 올라갔다.
비는 거의 멎었지만 바람은 장난이 아니었다. 비닐우의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지막 바위를 잡고 올라서니 바위에 우뚝 선 표지석이 보였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이다. 이 때가 오전7시20분. 비와 안개 때문에 우리들 외엔 올라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자욱한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정상은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신선들이 사는 세상이 이럴까? 세속의 검고 더러운 것들은 사라지고 오직 순수하고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선계(仙界)만 펼쳐진다. 벅찬 감격이 밀려온다. 숨을 고른 후 우리끼리 기념촬영을 하고 있을 때 남자 일행 두 사람이 올라왔다. 서로 기념촬영을 해주고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이라고 쉽게 보아선 안 된다. 우리들의 목표지인 대원사방향은 오르막 내리막이 많을 뿐더러 길어서 매우 지루한 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산할 때 이 길을 피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리산 종주산행의 정석은 이 코스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해발 1874m의 중봉이 우리들의 길을 막는다.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천신만고 끝에 중봉을 지나 다시 한 시간 반쯤 내려오니 이번엔 1642m 서리봉이 버티고 있다. 불과 2.2km 사이에 험한 봉우리 두 개를 넘었다. 서리봉에 오르니 전망이 정말 좋았다. 그 사이 구름도 활짝 걷혀 드러난 파란 하늘이 우리를 약 올리는 듯 했다. 정말 약도 오른다. 간발의 차이로 우리는 조금 전까지 구름만 보며 내려왔으니 말이다.
서리봉을 끝으로 크게 어려운 길은 끝났다. 곧 이어 도착한 치밭목산장에서 이번 산행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햇볕은 쨍쨍 빛나고 있었다. 배낭커버를 했는데도 습기에 흠뻑 젖은 옷가지들을 모두 꺼내 나무에 널어 말리며 느긋하게 식사했다. 옆에서 식사하던 대전에서 왔다는 부부는 남은 가스를 우리에게 주고 내려갔다. 오랫동안 등산객들을 쉬게 해준 이 산장은 올해8월말 헐리고 새집으로 건축된다고 한다. 30년 넘게 이 산장을 지켜왔다는 60대중반 산장지기의 구수한 입담과 인정에 감사하며 하산을 재촉했다.
평탄하리라 예상하고 등산지팡이를 접어 배낭에 꽂았지만 좀 성급했던 것 같았다. 빗물에 흙이 씻겨나가고 패인 길은 등산로라기엔 개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발밑을 신경 쓰느라 한동안 경치를 즐길 엄두도 못 냈다. 이런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길은 조릿대 숲을 지나 능선으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조릿대는 사람 키만큼 커서 우리들은 조릿대 터널 속을 한 시간쯤 걸었다.
능선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원사 입구의 넓고 긴 계곡엔 신록의 물결이 넘쳐흐른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녹색의 바다다. 계곡 끝에 아스라이 보이는 강줄기는 아마도 남강의 상류 쪽 지류일 것 같다. 녹색의 계곡물은 거기로 흘러들어 강물까지 녹색으로 물들일지 모르겠다. 이윽고 능선에서 내려오니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넓은 계곡이 나타났다. 자동차가 들어오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와 가까운 곳이다.
우리들은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연 나흘 약50km에 가까운 험한 산길을 달려온 발, 산장의 사정으로 그동안 한 번도 못 씻은 발을 물에 담그니 온 몸의 피로가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정말 고생을 도맡아 한 발에게 감사하고 싶다, 족욕과 세수로 피로를 달랜 일행은 마지막 산길을 내려와 대원사 근처 유평리에 도착했다. 마을 주막에서 도토리묵, 산나물 튀김에 막걸리로 무사히 지리산종주산행을 마친 것을 자축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갑자기 '금주'라는 큰 뜻을 세우고 반년넘게 술을 멀리 해오던 권병구사우도 이날만은 막걸리를 신나게 마셨다. 이 집은 강신정사우가 7년 전 종주산행 때 들렸던 집이어서 더욱 정다웠다. 오랜만에 마시는 막걸리 한 잔속에 산행의 즐거움과 어려움이 함께 녹아 들어갔다. 막걸리 기운이 오르니 다시 천왕봉으로 가고 싶어진다. 우리는 우거진 숲과 맑은 계곡을 따라 난 포장도로 4km를 걸어 나와 진주행 버스를 탔다.
<추신> 진주로 나와 모텔을 정하고 삼겹살에 소주로 종주산행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조용한 방에서 숙면을 했다. 다음날 아침 진주의 명물 시래기 따로국밥으로 해장을 하고 촉석루와 의암 관광도 했다. 또 진주성을 한 바퀴 돌고 진주박물관에도 들려 임진왜란의 참상과 진주시민들의 애국심을 가슴깊이 새겼다. 이어 중앙시장에 있는 맛집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으로 점심 먹고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에서 호프로 4박5일의 여정을 끝냈다. < 끝 >
* 이 글은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인 2016년 5월에 작성, 타매체에 기고했던 것입니다.
코로나로 지리산 종주산행이 어려워진 답답함을 달래는 데 이 글이 도움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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