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며 나하고 달린 21.1km
기록욕심 버리니 마음이 편해져
2시간 반 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 가끔 옆은 봤지만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옆 사람이나 스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나 목례, 손짓은 했지만 대화는 없었다. 주로(走路)를 달리는 동안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앞이나 좌우로 보이는 사물과 풍경들이나 시원한 바람, 해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도 달리는 동안에는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 생각 속에 갇혀서 나하고만 대화하며 21.1km를 달렸다.
4월 마지막 날 오전7시가 지나면서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일만여 명의 인파가 꽉 들어찼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하프 마라톤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반바지에 검정 반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저미다 가슴엔 큼직한 숫자가 적힌 네모난 배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주최 측 발표에 따르며 참가신청자는 약1만2700 여명인데 그중 60%정도가 2030세대란다. 나처럼 70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젊은이들 가운데 섞여 음악에 맞춰 함께 율동하고 소리치며 준비 운동 하니 나도 덩달아 젊은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루 전날 종일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기온은 봄 날씨답지 않게 쌀쌀했다 그렇지만 참가자들이 뿜어내는 열기 탓에 광장은 후끈했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각 8시에 출발신호와 함께 마라톤이 시작됐다. 이날 참가자들은 하프코스와 10km 출전자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프코스 출전자들이 먼저 출발했다. 또 기록이 빠른 사람들부터 출발한 탓에 기록이 저조한 나는 뒤쪽에서 달렸다. 우리 뒤에 출발하는 10km에는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아 보였다. 하늘엔 옅은 구름이 약간 끼었을 뿐 대회가 끝날 때까지 날씨가 좋았다.
이 대회는 코로나 때문에 4년만에 재개됐다. 나는 4년전에도 이 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에 코스 사정을 잘 안다. 광화문 네거리를 떠난 우리들은 약간 내리막 경사인 세종로를 달리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서소문로를 지났다. 내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거리인데다 30년을 몸담았던 중앙일보 옛 사옥을 지날 땐 은근히 힘이 솟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서소문 고가도로를 지나면 나오는 충정로 고개가 이 대회 코스 전 구간 중 가장 높은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수월하게 달려오던 사람들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며 가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보폭을 줄이며 천천히 달려 고개를 넘었다.
길은 다시 약간 내리막으로 굴레방 다리를 지나 마포대로로 이어졌다. 드넓은 마포대로는 공덕동 오거리를 지나 마포대교 입구까지는 평탄해 달리기가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굴레방 다리를 지날 때부터 엉뚱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약 한 달전 산행하다 입은 왼쪽 발등근육의 가벼운 통증이 약간씩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데다 점점 심해지는 요의(尿意)때문이었다. 근육통은 각오를 했었지만 요의는 두 시간 넘게 화장실을 가지 않은 데 따른 생리현상이니 대책이 없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젊은 두 여자도 주유소 찾는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달렸다. 그런데 공덕동 오거리 근처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주유소 덕분에 급한 걱정을 덜 수가 있었다.
덕분에 다리도 약간 쉴 수가 있어 힘들이지 않고 마포대교까지 달렸다. 다리위로 올라가는 경사면에선 약간 속도와 보폭을 줄였다. 다리에 올라서니 한강이 좌우로 펼쳐지고 눈앞엔 진하고 붉은 테두리를 한 현대백화점 등 여의도 고층빌딩이 어서 오라는 듯 다가온다. 다리 중간쯤을 지나니 다시 약간씩 내리막 길이 계속됐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젊은이들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 속도가 갑자기 느려진 것도 아닌데 놀라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하프 코스 보다 5분쯤 늦게 출발한 10km출전한 사람들의 선두 그룹 주자들임을 알고 웃었다. 다리를 건너 여의도 공원옆 대로를 달리다 노들강에서 주로는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이어 KBS앞에서 여의도공원 옆으로 계속되는 똑 바른 도로를 지나 여의도 북쪽 강변길까지 달렸다. 함께 달려왔던 10km 참가자들은 그 부근에서 헤어졌다. 그들이 빠지고 나니 달리는 사람들이 확 줄어들어 썰렁한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숨이 차고 발등의 근육통도 신경이 쓰이는데 앞으로도 10km이상을 더 달릴 생각을 하니 맥이 빠진다. 그러나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법. 여의도 북쪽 강변길을 지나고 둔치의 주차장 옆으로 난 도로도 달렸다. 서강대교 아래 어두컴컴하고 긴 굴다리를 통과할 때는 주로옆 벽근처에 설치된 기계 밴드들에서 연주되는 고성의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들이 달림이들을 응원해주었다. 당산철교 아래를 지나니 길은 슬슬 경사를 높이더니 양화대교로 이어졌다. 자동차들이 사라진 넓은 다리 위를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렸다. 왼쪽 저 멀리 오늘 우리들의 종착지인 상암동 월드컵 평화공원이 보였다. 양화대교 북단에서 합정역 네거리까지는 약간 내리막 이어서 힘이 좀 덜 들었다. 그러나 합정역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지고 나니 약간 경사가 느껴지는 오르막이 나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지만 속도는 걸어가는 듯 느렸다. 양화대교 위를 달릴 때 내 옆에서 ‘파이팅’을 외쳐주던 나처럼 머리가 하얀 사람도 바로 앞에서 힘겹게 달리고 있었다. 망원역과 마포구청역 사이를 지날 땐 정말 힘이 들었다.
그 근방을 지날 때 5km마다 제공되는 물과 이온음료수, 간식 배부처가 나왔다. 나는 물을 마시고 머리에도 조금 끼얹었다. 이온음료수도 마셨지만 배가 고프지 않아 초코파이는 먹지 않았다. 거기가 15km를 조금 지난 곳이었다. 마침 시계를 찬 사람이 있어 시간을 물었더니 출발한 지 100분쯤 됐단다. 어림해보니 나의 4-5년전 기록보다는 조금 늦게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의 목표는 기록갱신이 아니라 완주였다. 걱정했던 발등근육의 통증은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진 않았다. 마포구청역 근처를 지날 땐 하얀 빛깔의 거대한 마포구청 건물이 오른쪽에 보였다. 불광천을 건너는 다리로 올라갈 때는 너무 힘들어 처음으로 보폭을 좀 크게 하면서 20m쯤 걸었다. 사실 느리게 뛰는 것과 속도엔 별 차이기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편했다. 불광천 다리를 건너고부터는 최고로 힘들게 느껴졌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의 우람한 모습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는 길은 평지이다. 그렇지만 한없이 똑 바르게 계속되는 4차선 도로다. 그런 길을 2-3km쯤 달리기란 정말 고역이다. 걷는 지 달리는 지 헷갈릴 정도로 허우적 거리며 힘겹게 달려 겨우 마지막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 남은 거리는 약2km. 조금 전 달려왔던 주로 건너편에 있던 마지막 음료배부처(종착지 1km앞)가 도대체 나타나지를 않는다. 주저앉고 싶은 생각과 싸우며 달리다 보니 음료배부처가 나와 물을 받아 머리에 끼얹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끝다 시피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했다. 드디어 완주. 26번째 하프코스 완주다. 오늘의 목표를 이루었다. 순식간에 고달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날의 내 기록은 2시간32분22초. 지난 해 10월 참가한 다른 하프마라톤대회 기록은 2시간22분26초, 4년전 이 대회 때 기록은 2시간13분23초.
< 2023년5월1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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