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둘레길에서 강원도 같은 정취 만끽
70대중반 벗들과 소풍길 어린이 기분 내
한 달 만에 다시 뭉친 70대 동기동창들의 걷기모임이었다. 코스도 똑 같은 서울 남산둘레길. 다만 이달엔 지난달에 걷다 남겨 둔 그 길의 남쪽 절반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 걸은 구간은 지난 번 구간과 달리 좁고 구불구불한 숲속의 산길이었다. 대부분의 구간이 흙길이거나 야자나무 잎으로 엮은 매트가 깔린 숲속 산책로를 70대 중반의 친구들은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떠들며 걸었다. 숲길이 우리를 젊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숲길을 예쁘게 보았는지는 따지지 말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와서 기다리는 장소에 초대한 사람이 꼴찌로 나타난다면? 지난15일 오전10시30분 서울지하철3호선 동국대입구역 6번 출구 앞 상황이 그랬다. 흉허물 없이 50여년을 친하게 지내 온 대학동기생들의 걷기 모임 출발지점에 호스트 격인 내가 꼴찌로, 그것도 약속한 10시30분에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도착했다. 옛날 학창시절 자주 했던 “학교 가까운 놈이 지각 잘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결코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어설픈 웃음으로 6명의 친구들과 악수했다. 나는 버스 타면 15분, 지하철을 이용하더라도 20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충공원 입구를 출발한 일행은 바로 근처에 있는 獎忠壇碑에서 조선의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10월)때 희생된 사람들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비석은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세워졌다가 1910년8월 일제에 의해 파쇄 됐으며 해방 후 다시 세워졌다. 일행은 장충공원과 동국대 입구도로를 지나 남산둘레길 북측순환로로 이어지는 긴 계단 길을 올라갔다. 우리 일행은 순환로에서 왼쪽으로 걸어 國弓 동호인들의 활터가 있는 석호정과 국립극장 뒤쪽 길을 걸었다. 도중에 지난달 걷기 때도 들렸던 소나무 생태복원구간 450여m를 거쳐서 남산둘레길 남측구간이 시작되는 곳으로 갔다.
국립극장입구에서 남산 정상으로 통하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조금 올라가면 한양도성이 이 길 때문에 끊어진 곳이 나온다. 그 바로 옆에 있는 나무 데크 쉼터에서 일행은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맛있는 과일을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동차 길과 헤어져 좁은 숲길이 계속되는 남산둘레길로 들어섰다. 좁다란 숲길은 곳에 따라 야자수 잎 매트가 깔렸거나 시멘트 포장이 돼있지만 대부분은 흙길이다. 바로 곁에 남산공원 관리를 위해 정상으로 올라가는 자동차나 관광용 전기버스가 다니는 포장도로가 있지만 숲이 무성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차량통행도 별로 없어 조용한 산속 같은 분위기다.
작지만 개울을 건너가는 나무다리도 나오고 맘껏 쉬며 담소와 간식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나 벤치, 잠시 몸을 눕힐 수 있는 넓은 마루의 원두막도 있다. 이 구역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남산의 상징과도 같은 소나무를 집중관리하는 팔도소나무단지도 있다. 눈길을 끄는 소나무는 2010년식목일에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광수 산림청장이 심은 정이품 맏아들 소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속리산의 정이품소나무를 아버지로 한 첫 자식이란다.
우리는 소나무단지 근처 테이블에서 준비해 온 과일과 과자 등을 먹으며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옅은 구름이 낀 날씨에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정말 시원했다. 서로가 살아오며 듣고 보고 깨달은 얘기들이라 들을수록 재미있어 시간을 잊고 맘껏 여유를 즐겼다. 다시 걸음을 시작한 일행은 숲속에 마련된 이끼정원과 어여쁜 수련꽃들이 방긋 웃는 연못도 지났다. 지나는 길손에게 부탁해 단체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숲속의 길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지고 또 만나기를 반복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오늘 이 숲속의 길들은 꽃가지 그늘보다는 무성한 나무가지들의 그늘로 이어졌다. 이정표엔 '사색의 공간'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정표를 지나니 길은 더 좁아지고 무성한 숲속으로 이어졌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데다 오르내림도 조금 심해지고 오래 된 굵은 소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묵묵히 발밑을 조심하며 한발한발 걸었다. 이 구간을 사색의 공간이라 이름붙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마냥 시원하고 평탄한 길만 이어진다면 그건 오히려 재미가 덜 할 것 같다. 기쁘고 슬픈 일들이 교차되는 우리네 삶도 그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걸어 남산도서관이 가까운 곳에서 다시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들어갔다. 양옆에 늘어 선 높고 울창한 벚나무들이 맞닿아 터널을 이룬 내리막 길엔 몇몇 자전거 탄 사람들이 쏜살처럼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그 사람들처럼 전속력으로 달려보고 싶어진다.
이윽고 우리는 남산도서관앞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퇴계와 다산 동상을 지나 백범광장으로 올라갔다. 나무가 적은 데다 넓은 광장이라 초여름답지 않은 더위의 열기가 느껴졌다. 광장 아랫쪽에 일부만 복원된 한양도성이 있다. 우리는 도성벽 바깥길을 따라 내려와 남대문시장 골목안 맛집 막내횟집을 찾았다. 지난 날 내가 30여년 몸담았던 회사가 근처에 있어 사장과는 잘 아는 집이기도 했다. 내 체면을 살려주려는 듯 싱싱한 생선에다 서비스 먹을거리까지 푸짐하게 내주어 일행 모두를 신나게 해주었다. 식사 후 양승함 동기회장이 내년에 예정된 졸업50주년 재상봉 행사 진행계획과 경비조달 방법 등에 대해 얘기했다. 이날 모임경비는 회비를 일부 걷고 부족분을 한 친구가 계산했다.
< 2023년6월18일 오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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