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산책 길에 묘한 웃음 짓다
밤새 심하게 내리던 비가 그친 이른 아침 구름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나뭇잎에 송알송알 맺혀있는 물방울들이 은구슬처럼 반짝였다. 길에도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었다. 습기 머금은 아침공기도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미풍이 살짝 지나가면 그 은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지던 오늘 아침 우리 동네 동산 길을 걸었다.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동네의 동산들엔 숲이 무성해 하늘이 잘 안 보일 정도다. 좌우로 펼쳐지는 한강과 서울 도심의 아침 풍경은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이 동산 길엔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철철이 번갈아 피어나 더욱 나를 즐겁게 해 준다. 초봄의 산수유나 진달래, 개나리를 시작으로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국화까지 꽃 잔치는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또한 잎들의 색깔도 봄날의 연두색 신록에서부터 울긋불긋 가을단풍까지 다양하게 펼쳐지니 굳이 힘들여 멀리 나들이 가지 않아도 좋은 곳. 바로 내가 사는 동네이고 서울인 것 같다.
요즘은 장미들의 큰잔치가 거의 끝나고 장미 향기도 약해져 가고 있다. 그런데 밤비 그친 상쾌한 오늘 아침 산길에서 새로운 꽃냄새가 나를 불렀다. 장미나 라일락처럼 향기롭지는 않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꽃냄새였다. 이 냄새를 맡게 되면 거의 틀림없이 본능적 감각과 연상되는 일화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연상은 혼자서 피식 거리며 묘한 웃음짓고 넘겨버리는 것이다. 나는 길을 멈추고 은방울 같은 물방울들이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냄새의 진원지를 금방 찾아냈다. 간밤의 비에 젖어 특유의 밝은 색깔은 약간 벗어났지만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들이었다. 비에 젖지 않았을 대 보다는 약간 어둡게 보였고 노란 색을 품었지만 흰색에 가까운 밤꽃들이었다. 주변에는 밤나무가 몇 그루 더 있었다. 길쭉길쭉 하게 피는 밤나무 꽃은 새로 자라난 가지의 잎 마디마다 한 송이씩 한꺼번에 여러 개가 핀다. 그 때문에 꽃송이들이 많아 꽃냄새도 상당히 강하게 퍼진다. 다만 이날 아침엔 비에 젖은 탓에 냄새가 평소보다는 조금 옅어졌을 것 같지만 틀림없는 <그 냄새>였다.
내가 말 한 <그 냄새>는 성인 남녀, 특히 기혼자라면 모두가 아는 냄새다. 옛날부터 밤꽃 냄새나 밤송이와 연관되는 성(性)농담들과 웃자고 지어낸 맹랑한 얘기들은 참 많다. 특히 그 내용들은 여자들 앞에서는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이런 얘기들은 내 고향 마을 개천가에 있던 커다란 두 그루 밤나무 아래에서도 자주 오고 갔었다.그래서 우리 친구들 대부분은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밤꽃이 만발한 곳을 지날 때쯤이면 슬며시 웃게 되나보다. 나 역시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밤꽃들의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웃고 지나왔다. 나는 이 길을 여러 해 다녔기 때문에 해마다 밤이 상당히 많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다만 밤이 익어 밤송이가 벌어질 무렵이면 오가는 사람들이 다 따버리고 늦가을까지 달려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마침 간밤에 지인이 보내 온 밤꽃과 관련된 시 한수가 있어 공유한다.
밤꽃 피는 계절
/ 유 응 교
오매!
환장허것네.
싱그러운 풀 이파리에
박가분 풀어 놓았나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유월의 농밀한 유혹
말미잘의 풋풋한 내음으로
옷고름 풀어 헤친
저 까실까실한
가슴을 보게
밤꽃은 언제나
밤에만 사랑을 나누고
밤에만 욕정을
불태울 줄 알았는데
대낮 초장부터
이게뭐람?
푸른 유월의 숲 자락에
쏟아 놓는
저 은밀한 향기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저 새댁
그냥 못 지나겠네.
눈웃음 살살치는
앞집 순이도
엉덩이 탱글탱글한
뒷집 월촌댁도
인터넷 채팅에
늦 바람난
옆집 철이 엄마도
그냥은 못 지나겠네.
유월초봄
집집마다
베개 던지는 소리
사리문 밀치고
내닫는 사랑 싸움
골목길마다 흥건하겠네.
밤꽃 피는 이 계절에...
🍒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내가 밤꽃 냄새 맡던 그 시간에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여자들은 없었다.
< 2023년6월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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