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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감의 소리를 듣는다

단상

by 솔 뫼 2023. 8. 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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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속에 숨어 주황색 때때 옷 입을 날 꿈꾼다
 
 


내가 아침운동 다니는 길가에 있는 어린이집 야트막한 담장안엔 잎은 무성하지만 키는 별로 크지 않은 감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붙어 서있다.
아직 젊은 나무여서 높이가 내 키의 3배정도 밖에 안 되지만 가지와 잎은 무척 무성하다. 
2년전 봄에 이사온 나는 올해 이 동네에서 세 번째의 여름을 맞았다. 지난 5월중순쯤 노란 감꽃들이 연두빛 새잎들 사이에 잔뜩 핀 것을 보았다. 그랬는데 어느새 꽃들이 사라지고 감나무는 잎만 무성하게 피어 녹색의 병풍처럼 보였다. 싱싱한 녹색의 감잎들은 앞면이 반들반들 하고 광택이 있어 바람이 불면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감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성한 녹색의 잎들속에 밤톨만한 땡감들이 무수히 달린 것을 보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모습이지만 오늘 아침엔 유달리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기에 무심했던 탓이리라. 그 때문에 꽃을 떨어뜨린 어린 감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아침 내가 땡감들을 보게 된 건 때마침 불어 온 바람에 잎새들 속에 가려졌던 어린 땡감들이 아침햇살에 비쳐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벌써 알밤만하게 자랐다. 게다가 짙은 녹색의 탱글탱글한 감들이 무척 단단해 보이는 고종시(대봉감)였다. 자세히 보고있으니 그 순간에도 굵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새파랗게 어린 초록빛 땡감들이다. 지루히게 계속 된 장마속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잘 견디어 낸 어린 감들이 대견스러웠다. 주변의 땅바닥을 살펴보니 떨어진 풋감들이 여러 개 보인다. 그 중 몇개는 행인들이 밟아 으깨진 것들도 있었다.
 
내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여덟그루나 있었는데 모두가 고목이어서 높이도 엄첨 높았다. 나도 어린 시절 그 나무들 위에 올라가서 감을 땄었고 여덟살 아래인 막내동생도 올라가서 감을 땄다. 그래서 나는  감꽃이 피어서 늦가을 홍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안다. 초여름에 감꽃이 피면 이른 아침에 나가서 땅에 하얗게 떨어진 감꽃들을 주웠다. 그 꽃들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아 목에 걸기도 했고 조그만  바구니 등에 줏어 담아 말려서 별미로 먹기도 했다. 감꽃을 말리면 짙은 고동색으로 변하고 맛도 매우 달았다.
 


그 후 감꽃이 없어지면 감나무는 당분간 우리 조무래기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다 장마철이 되면 도토리 만큼 자란 땡감들이 무수히 떨어진다. 장마가 지나고 폭염이 계속될때까지 달려있는 감들은 처음의 절반도 안 될 정도다. 그 후로도 비가 한 차례씩 지나 갈때마다 또 많은 땡감들이 떨어지고 끝까지 달려있는 것들만 가을날 짙은 주황색으로 붉게 익는다. 장마 후 늦여름에 떨어지는 땡감들은 아기 주먹만큼이나 굵어졌지만 무척 떫다. 조무래기들은 이런 땡감들을 주워다가 소다 가루나 소금을 조금 탄 물에 2-3일 담가 떫은 맛을 빼낸 후 군것질 거리로 먹곤 했다. 윤기가 흐르는 땡감들이 불러 온 어린 날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늘 아침에 본 나무에 달린 땡감들도 상당수는 익기 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떨어지지 않고 굵어져 가을날의 주황빛 영광을 맛 볼 것이다. 탱글탱글 굵어지고 있는 감들 모두가 한 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다. "떫고 작은 땡감이라고 깔보지 말아요. 머잖은  날에 예쁜 주황색 때때옷 입고 달콤한 감이 될테니까 지켜보세요!"라고.  나는 잘 익은 대봉감을 연상하며 그 감나무 아래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 어린 땡감들에게 '올해는 부디 늦가을까지 잘 견뎌 소원을 아루라'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왜냐 하면 지나 간 두 개의 가을 모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감들이 채 익기도 전에 야금 야금 줄어들다 가을이 됐을 땐 하나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도했다. 여기를 지나다니는  모든 분들이 올해는 제대로 익지 않은 감을 따지말고 가을에 주황색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함께 보게 해달라고.


                          <  2023년8월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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