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아침 찬 바람에 더 쓸쓸해 보여
靑雲의 꿈 이루지 못 한 내 처지 닮은 듯
갑자기 아침 기온이 빙점 근처까지 떨어진 데다 바람까지 솔솔 부는 추운 초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하나만 달랑 남은 짙은 주황색 감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떨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도 새파란 하늘 탓에 더 춥고 외롭게 보이네요.
오늘은 2023년11월15일.
매년 돌아오지만 이 날은 제 삶에 있어서 매우 뜻깊은 한 획이 그어진 날입니다. 물론 저 혼자만이 그은 건 아니고 43명의 벗들과 함께 그었지요. 49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들은 저마다 가슴에 푸르고 높은 꿈과 이상을 품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국내 굴지의 그룹이 운영하던 종합언론사의 대회의실에서 만났습니다. 신문과 방송, 잡지까지 아우른 종합언론사 였기에 직종 또한 다양했고 각자의 꿈도 각양각색 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날 이후 어언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기간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과 우리나라 전체의 상황으로도 엄청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또 함께 삶의 여정에 섰던 벗들 중 성미 급한 일부는 일찍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떠났고요.
그리고 찬바람 부는 이 초겨울 아침 70대 중반에 이른 나는 홀로 동네 산책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반세기 전 품었었던 내 푸른 꿈도 이제는 속절 없이 빛이 바래고 말았습니다. 혼자 남아 외로이 떨고 있는 저 대봉감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는 추운 아침. 그날 함께 만나 출발했던 벗님들은 모두 각 자의 분야에서 빛을 발했고 꿈을 쫓아 열심히 살았습니다. 소풍 끝나고 떠난 벗들을 제외한 벗들 중엔 세속적 목표치를 달성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결코 그러질 못 했지만 결코 후회는 않겠습니다. 저의 능려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그 사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두 딸을 얻어 남부럽지 않게 키웠습니다. 딸들은 이제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저의 작은 행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 길에서 감나무 꼭대기 우듬지에 외롭게 한 개 남은 감을 보면서 갑자기 밀려드는 悲感에 젖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시골 내 고향집과 마을엔 감나무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늦가을이면 잎이 거의 떨어진 감나무들마다 빨갛게 익은 감들이 꽃처럼 빨갛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을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감을 거의 다 따고 꼭대기에 2~3개만 남겨두었지요. 추운 겨울 지낼동안 까치들이 먹으라고 남겨둔다지요? 우리들은 이를 까치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까치밥으로 남은 감의 입장은 어떨까요? 늦겨울의 추위와 이른 봄의 찬 바람을 이기고 나온 싹이 꽃을 피웠을 때부터 오뉴월 폭염과 장마, 그리고 사나운 태풍까지 견뎌 온 감 입니다. 그리고 충실하고 예쁘게 익은 자신이 겨우 까치밥 신세로 전락한 것이 기분 좋지는 않겠지요? 이 아침 제가 갑자기 비감스러워 진 것도 까치밥이 된 이 감의 심정과 같은 것일까요? 청운의 꿈은 못 이룬 채 속절 없이 初老에 접어들어 쌀쌀한 아침 길에서 약해져 가는 심신을 단련해 보겠다고 용쓰는 한심한 늙은이가 나이기 때문이겠지요?
마침 지인이 보내 주는 詩 중에서 한겨울의 홍시를 읊은 것이 있어 옮겨봤습니다.
■ 홍시의 고집 (김현태, 1971~)
겨울이 다 지나도록
여태 저 놈, 허공을 붙들고 있다
이제 그만 내려와도
되련만,
이 악물고 버,티,고, 있다
내려와, 아랫목에 등 지져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는데
무슨 생고집인지
나뭇가지의 목덜미 놓아주지 않는다
바람이 들이닥칠 때면
홍시는 손아귀 힘을 더욱 준다
그럴 때마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홍시는 끝끝내 버티려 한다
봄이 올 때까지만
홍시는 아는 것이다
자신마저 훌훌 털고 쪼르륵 내려온다면
홀로 긴 겨울을 버텨야 하는
나뭇가지의 아픔을
홍시, 조금은 아는 것이다.
- 2001년 시집 <마음도둑 사랑도둑> (책만드는집)
11월 중순으로 접어 든 요즘 나무들은 어느 새 잎들이 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돋보이는 내 고향집과 마을의 빨갛게 익은 감들이 보고싶어 집니다. 지금 고향의 감나무들엔 감이 얼마나 달려 있을까요?
< 2023년11월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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