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길 걷기의 즐거움

단상

by 솔 뫼 2023. 7. 18. 22:38

본문

담장옆 봉숭아 백일홍보며 옛 친구 생각
꽃나무 심은 화분들로 집 앞길을 푸르게
 
 


정말 정겹고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6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소년이 됐다. 봄바람, 장맛비, 뜨거운 여름 햇살, 그리고 서늘한 가을날의 파란 하늘도 덩달아 떠오른다. 그 속에서 함께 뛰놀았던 친구들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그 친구들도 오늘 내가 만난 친구들을 본다면 나랑 같은 생각을 할까?
 
지루한 장마와 폭우가 온 나라를 할퀴며 비를 뿌려대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산사태와 강물 범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랬던 지난 7월18일 오후3시쯤 나는 친구와 점심식사 후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을 지나 집으로 오고 있었다. 그곳은 최신형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들로 대표되는 개발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은 동네였다. 세계적 수준의 첨단도시 서울이지만 아직도 반세기 전의 모습을 버리지 못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점심때까지도 내렸던 비는 그치고 열기 머금은 한여름의 더운 햇살이 구름을 뚫고 간간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량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좁다란 길 양쪽에 허름한 2-3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초록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거무튀튀한 아스팔트와 시멘트만 보이는 회색도시라는 표현이 걸 맞는 곳이다.
 


그런데 그 길에 그야말로 눈에 반짝 띄는 것이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신선한 느낌이 드는 작은 꽃밭이었다. 가정집으로 보이는 집 시멘트 담장 아래에 만들어진 꽃밭이었다. 담장엔 해바라기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꽃밭은 꽃나무를 심은 화분들을 촘촘히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거기엔 봉숭아와 백일홍, 참나리 꽃이 정말 예쁘게 피어있었다. 푸른 잎에 살짝 가린 봉숭아꽃은 석류꽃처럼 빨갰고 백일홍은 아기들 우산마냥 동그랗게 피었다. 그 뒤엔 꽃이 안 맺힌 맨드라미가 자라고 고추나무도 한 포기 있었다. 그야말로 ‘울밑에선 봉선화’란 노래가 들려올 것 같은 풍경이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이 보다 더 정겨운 광경이 없었다.
 


이날 내가 만난 친구들은 바로 이 화분속의 꽃들이었다. 내 고향마을은 1백여 호나 되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지만 농촌이어서 기와집은 딱 3집뿐이었다. 그렇지만 집집마다 널따란 마당이 있었고 담장 아래나 마당 한 귀퉁이에 크고 작은 화단들이 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우리들은 각종 꽃모종을 얻어다 심고 가꾸며 자랑하고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이 즐겨 심고 가꾼 것은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해바라기 같은 일년생 화초들이었다. 장미나 파초 다알리아 등 가꾸기 어려운 것들은 누나나 형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자랐기에 이날 만난 일년생 꽃들이 내겐  죽마고우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서울의 한 가운데 인데도 옛 모습을 간직한 골목과 집들이 많이 있다. 그런 곳은 비교적 높은 언덕에 있다. 그 골목길들을 나는 아침운동 길에 가끔 지나곤 한다. 거기에도 어제 지나온 골목처럼 나의 소년기 추억들을 불러오는 것들이 많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집 앞 길가에 내어놓은 화분에다 기른 꽃들이다. 그 골목의 집들은 높거나 새집이 아니지만 집 앞의 화분들에 꽃을 가꾸는 곳들이 많다. 크기도 다르고 가꾸는 화초들도 각각이지만 봄부터 늦가을까지 잇따라 각종 꽃들이 피어난다. 가뭄이 심할 땐 화초에 물을 주는 모습도 자주 볼 수가 있어 정감이 더욱 가는 골목풍경들이다.
 


그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허름하고 길쭉한 단층기와집 앞 화분들이다. 그 집은 뒤나 옆엔 2-3층짜리 집이 있어 더 초라해 보인다. 그렇지만 20여개의 화분에다 기른 크고 작은 꽃나무들이 집 앞을 가렸다. 그 중 한 나무는 지붕 위까지 자랐고 반대쪽엔 호박넝쿨 한 줄기가 추녀를 타고 지붕위로 벋어 가고 있었다. 나처럼 나이 많은 주인이 옛날을 회상하며 정성들여 꽃을 가꾸며 사는 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 꽃나무들이 어려 어떤 꽃들이 필지는 모르겠다.
 


이 골목에는 이처럼 꽃나무를 심은 화분들을 길에 내놓아 회색 마을길을 푸르게 만드는 정겨운 집들이 많이 있었다. 조금 규모가 큰 어느 건물의 좁은 화단엔 내 키만큼 자란 무궁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좁은 화단이나 화분에서 피는 꽃들에서 나는 고향집과 고향마을의 꽃밭들을 보았다. 그리고 철철이 꽃모종을 나누고 가꾸며 함께 자랐던 친구들도 떠올린다. 이런 게 바로 길 위에서 느끼는 즐거움이고 행복이 아닐까? ‘소나무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둔다’는 비둘기의 심정이 나와 같으리라. 예쁘게 가꾼 꽃들을 자랑하느라 신이 난 ‘봉숭아꽃 할머니’ 얼굴에도 기쁨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걷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있는 작지만 신나는 마음의 선물일 것이다.
 

< 2023년7월19일 한낮에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