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달렸다. 나처럼 머리카락이 하얀 사람은 없었다. 젊고 발랄하고 예쁘기까지 한 젊은 남녀들 속에서 홀로 달리는 70대 중반의 노인이었지만 나는 결코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덩달아 나도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들과 이야기 나누고 주로를 양보하고, 시간을 물어보며 달렸다. 그리고 결승선을 통고하는 순간 먼저 경기를 마친 사람들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로 축하해 주었다. 땀 흘리며 달려온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즐거움만 남는다. 오직 힘겹게 달려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리라.
화창한 날에다 초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기온이 높았던 4월28일 이었다. 이날 이른 아침 곤히 잠든 집사람을 깨우지도 않고 인절미 몇 조각과 우유 한 컵으로 식사 후 7시20분쯤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타고 왔던 지하철 객차도 그랬지만 광화문역 역사 안과 광장에도 유니폼인 검정 러닝 셔츠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조선일보사가 추최한 2024 서울 하프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다. 주최 측에 따르면 하프와 10km 두 코스에 2만4명(공식발표)이 참가했단다.
나는 매년 풀코스나 하프코스에서 달렸다. 그러나 올해는 늑장을 부리다 마감을 놓쳐 하는 수 없이 10km에 참가했다. 내가 마라톤을 시작한 건 1999년9월 중앙일보 하프마라톤대회 때부터였다. 그 이후 풀코스 39회, 하프코스 26회를 달렸다. 첫해엔 5km, 다음 해(2000년11월)에 10km를 달린 후 10km를 달린 건 24년만이다. 특히 2016년부터는 딸들의 강력한 반대와 체력의 한계까지 느껴 풀코스 달리기는 멈추었다. 그런데 올해는 내 게으름 탓으로 10km를 달렸지만 이젠 하프코스도 뛰지 말라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공식 집계로는 10km 참가자들의 68%가 20-30세대라고 했다.
붐비는 달림이들 사이에서 물품을 보관시킨 후 주최 측이 제공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개인적 준비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1시간가량 쾅화문광장 공원은 시끌시끌 왁자지껄했다. 이야말로 젊음과 힘이 합쳐진 멋진 한판의 잔치마당이 아닐까? 하프코스 참가자들이 먼저 출발한 후 10km 참가자들이 뒤를 이어 세종로와 서소문로를 새까맣게 매운채 달렸다. 널디 넓은 서울 도심의 도로이지만 이날만은 좁게 느껴졌다. 양쪽 보도에선 참가자들이나 단체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응원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이 구간을 매년 봄 한 차례씩, 올해로 네 번째 달렸다. 서소문로로 들어서니 내 젊은 날의 추억과 꿈이 담긴 중앙일보 옛 건물과 새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옛 건물은 하얀 사각형 거푸집에 통째로 둘러싸였고 새 건물은 높이가 반으로 낮아진 채 윗부분에 사방을 가린 시설이 모자처럼 얹혀 있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겠지만 말 못 할 아픔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소문 고가도로를 지나 충정로 고개를 힘겹게 올라갔다. 고개마루를 지나면 굴레방다리 삼거리까지 완만한 내리막이라 한결 편했다.
그 즈음에서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서 밀며 달리는 사람을 만났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가와 아빠를 보며 응원을 보냈다. 아이는 31개월 됐단다. 유모차를 뒤로하고 애오개역을 지날 때쯤 갑자기 요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가 참 난감하다. 주변에 주유소라도 보이면 다행인데 아무리 가도 안 보이고 지하철역도 한참이나 지나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나처럼 하얀 머리가 한 사람 보였다, 키는 좀 작았고 나보다는 나이가 아래인 것 같았다. 소변처리 생각에 몰두하면서 달리다 보니 5km 안내판과 함께 급수대가 나왔다. 소변은 급해지기 시작했지만 갈중도 해결해야 했다. 시원한 스포츠음료 두 잔을 마시고 나니 오히려 요의가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포역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마포대교로 이어진다. 걷거나 달려 본 사람이라면 교각의 양쪽 끝에 이어진 도로의 경사도를 알 것이다. 힘들게 달려온 탓에 평지여도 힘 들판인데 오르막을 달려 올라가기란 심한 고역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변까지 눌러 참고 뛰어서 갈 수 없어 보폭을 최대한 넓혀서 걸었다. 경사를 오를 땐 보폭을 줄이는 대신 좀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만 걷는 것보다 별로 빠르지도 않고 힘만 더 든다. 그래서 200m쯤 걸어 다리에 오르니 7km 안내판이 반긴다. 평평한 데다 습기 품은 강바람이 시원하게 스쳐 힘이 솟았다.
그 다리에서 나는 초등학생 두 아들을 데리고 달리는 三父子도 만났다. 아이들도 10km 검정 러닝 셔츠를 입고 있어 정식으로 참가 등록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참 대단한 마라톤 가족이라고 할 수밖에. 아이들에게 파이팅을 외쳐 준 후 계속 앞으로 달렸다. 벌써 땀이 흐르고 숨도 가빴다. 달리기를 마친 후에 들으니 三母女 팀도 있었고 조부부터 손자까지 三代 팀도 있었다고 한다. 평평하게 느껴지는 다리위도 한가운데를 지나 여의도가 가까워 지면서 약한 내리막으로 변했다. 바로 앞에는 붉은 테두리가 인상적인 현대백화점, 그 뒤에는 전경련 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건너 여의도대로에 들어서니 여의도공원 안내판이 푸른 숲을 배경으로 서서 손짓을 한다. 가려줄 테니 내 뒤 숲속에서 ‘쉬-’ 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이를 악물고 참으며 좀 더 달려가니 마침내 구세주격인 화장실이 나왔다. 절에서 화장실을 解憂所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덕에 걱정은 사라졌고 걸음은 가벼워졌다. 여의도역을 지나 남쪽 샛강 근처에서 직각으로 우회전 후 KBS앞 도로에서 다시 직각으로 우회전, 북쪽으로 달렸다. 한참을 더 가니 10km 참가자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도로의 왼쪽 절반을 달려 북으로 가고 있는데 그들은 반환점을 돌아 오른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1km도 채 남지 않은 결승선이 그렇게도 멀고 힘들게 느껴질 줄 몰랐다. 나도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힘겹게 느껴지기는 풀코스나 하프코스를 완주한 것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주최 측에서 나누어 주는 시원한 스포츠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맡긴 짐을 찾으러 갔다. 도중에 초코파이, 커다란 빵과 바나나, 파워 젤, 초코우유를 담은 간식 봉지와 완주 메달을 받았다.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다른 완주자들에게 부탁해 기념 촬영을 하고 서로 격려의 덕담들을 주고받으며 마라톤을 마쳤다. 결승점으로 찾아온 집사람과 만나 근처의 공원 그늘에서 숨고르기를 했고 수양버들 하얀 꽃송이들이 눈처럼 날리는 샛강생태공원 길을 걸었다. 철 이르게 핀 하얀 아카시아 향기가 강하게 코를 찌른 초여름 같은 봄날의 한낮이었다.
오늘 10km를 달리며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코스는 나처럼 나이 많아 힘이 약해진 베테랑들이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기를 즐기려는 힘찬 젊은이들의 놀이터란 사실을!
< 2024년4월28일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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