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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걸으니 보이는 것들> 出刊

단상

by 솔 뫼 2024. 12. 1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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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중반에 처음 책을 냈습니다.

 

 
“환갑(還甲)에 능참봉(陵參奉)!”이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의 뜻을 아십니까? 조선 시대 관청의 최하위직 말단 종9품의 관직이 참봉입니다. 나이 60을 넘어 얻은 벼슬이 고작 능(陵)을 관리하는 능지기 같은 말단이라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잘난 능참봉도 벼슬이라고 뽐낸다면 비웃음밖에 살 게 없겠지요? 제가 최근 ‘환갑에 능참봉’이란 소리 듣기에 딱 알맞은 일 한 가지를 저질렀습니다.
 
오래 망설여왔던 일이지만 주변 친구들의 강력한 응원과 지원에 힘입어 여행 에세이 <걸으니 보이는 것들>을 출간했습니다. 비매품으로 자비 출판한 신국판 312쪽 짜리 책입니다. 이 책을 내느라 초벌로 쓴 원고를 다시 고치고, 다듬고, 빠진 글자나 틀린 글자를 찾는 교열까지 보느라 늦여름부터 4개월을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 바람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냈습니다.
 

해파랑길 750km 시발점 부산 오륙도공원에서.
금강산 동쪽자락과 해금강이 바라 보이는 통일전망대에서.

 
그렇게 만든 책이 며칠 전 배달됐습니다. 제 이름이 붙은 책을 받아드는 순간 마치 첫 아이를 얻어 품에 안았을 때와 비슷한 희열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지난 몇 달간 노심초사하며 보냈던 힘들었던 일들이 마치 즐거웠던 것처럼 다가오네요. 흔히들 책을 내는 일을 産苦에 비유하곤 하곤 하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저는 이 拙著에 중앙일보 사우들이나 대학동기, 기타 디른 학우들과 함께 걷고 넘었던 지리산 둘레길과 동해안 해파랑길, 남도와 다도해 여행길 등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와 사진들을 담았습니다. 그동안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두었던 이야기들로 묶었습니다. 그중 발간사를 여기에 공유합니다.
 

운무에 싸여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지리산 봉우리.
지리산 둘레길 완보 후 남원 안내소에서.
땅끝 해남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본 다도해 모습

 

< 내 얘기들을 묶으며 >

 
사람들은 지난 날을 회상할 때 ‘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아왔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젖은 짚단을 태우면 연기는 무척 나지만 불꽃은 제대로 피지 않아 애를 태운다. 내 삶도 그랬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 것 같지만 결과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 후회만 쌓인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싶었던 청운의 꿈들은 물거품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법석을 떨었던 일들도 소리만 요란했을 뿐 허공의 구름 한 점 스러지듯 흔적도 없어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흐르는 세월 따라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저 공부 잘한다는 소리 들으며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했고, 고등고시보다 어렵다는 언론사 기자채용시험에 합격한 것까지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던가? 제대로 살며 노력했다면 이루거나 펼칠 수 있었던 많은 가능성들을 모두 날려버린 데 대한 자괴감만 쌓인다. 날마다 대하고 마주쳤던 사람들과 처리했던 그 숱한 일들이 과연 내 삶에 어떻게 작용했고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가?
 
국가와 민족, 사회를 위해서 무얼 했느냐고까지는 묻고 싶지 않다.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소소하고 보람도 없는 사안들에 탐닉했고 제대로 된 앞날의 자화상조차 만들지 못한 채 허송세월했다. 일 처리 방법 또한 후회막급이다. 한발 물러서고 양보하고 남의 말도 들으며 일했어야 했다. 그러나 고집부리고 내 주장만 내세우곤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70대 중반을 넘은 초라한 내 모습이 거울 속에서 나를 비웃고 있을 뿐이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내 어리석음의 결과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기에 여기에 담긴 얘기들은 농사를 망친 농부가 추수할 것 별로 없는 논밭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쓴 것들이다. 지나온 삶이 충실했다면 자랑할 일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서리 내린 논밭에서 부실한 작물을 보며 회한에 젖는 농부 모습이 오늘의 내 모습과 같을 것이다.
 

운무에 둘러 싸인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에서.

 
그래서 어느 날 더 늦기 전에 지나간 날의 나를 돌아보고 닥쳐올 삶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먼 길 걷기에 나섰다. 같은 회사에서 젊음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도 걸었고 청운의 꿈을 안고 동문수학한 동창생이나 학우들과도 걸었다. 지리산의 둘레길 700리도 걸었고 천왕봉을 비록한 준령들도 넘었다. 동해의 만경창파를 벗하며 해파랑길 2.000리도 걷고 비무장지대 부근도 누볐다. 천연 그대로의 자연은 물론 인공이 가미된 자연에서도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렇게 걸으며 나는 다짐했다. ‘푸르렀던 젊음은 이제 내 곁을 떠났다. 그러나 아직 남은 날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노년이라는 삶의 조각품을 만들어 가리라고.’ 그리고 그 길에서 경험한 이야기들만 여기에 모아 묶었다.
 
제대로 가꾸지 않아 텅 빈 논밭 같은 그 밖의 이야기들은 가슴속에만 묻어두기로 했다. 다만 나의 정체성을 말해 줄 몇 가지 사안들은 뒷부분에 추가했다. 그저 일기 쓰듯 내 개인 블로그에 기록해 둔 얘기들이어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내용도 없고 심오한 사상이나 내용도 물론 없다. 그렇지만 내 삶의 궤적이 진솔하게 담긴 것임엔 틀림이 없다.
 
내 글을 자주 접한 친구들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는 진흙일 뿐이다. 꺼내서 닦고 꿰어야 보석이 된다.”고 격려했다. 그중 한 친구는 어머님이 남긴 일기 등을 모아 그 시절의 사랑과 애환 등을 회고집으로 묶어 나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이런 벗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도 틈틈이 써두었던 여행기 등을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을 함께 걸은 도반(道伴)들과 격려하고 응원해 준 벗들에게 바친다.
 
2024년11월
솔뫼 석 인 호 씀

보길도 땅끝전망에서 대학동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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