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걷기는 즐거움도 많았지만 어려움과 난감함도 여러 차례 교차했던 행보(行步)였다. 만발한 금계국이 황금빛으로 물들인 꽃길에선 행복했다. 분홍빛 해당화꽃이 수줍은 웃음 띠며 반겨주던 해안 방조제길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 둑 위로 이어진 짙은 녹음 터널도 지나왔다. 밀림처럼 우거진 수풀이 짙은 어둠을 펼친 산속의 길에서 듣는 새소리들은 우리를 한없이 즐겁게 해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좌우의 드넓은 논에선 최근에 모내기한 벼들의 초록색 생장력(生長力)이 넘치고 있었다. 옮겨심은 새 땅에 뿌리내린 벼들이 오와 열을 지어 자라는 모습에선 초등학교 운동장에 줄지어 선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옆의 밭에서는 어른들 키만큼 자란 옥수수들이 기다란 잎들을 늘어뜨린 채 초여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고구마와 감자잎들도 온 밭을 녹색의 바다로 만들었다. 이 모든 초록빛을 쓰다듬으며 불어온 해풍은 우리들에게 시원함을 한 아름씩 안겨주고 갔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길 위에 선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고 즐거움이리라.



그러나 세상사가 모두 순풍에 돛단 듯 계속될 수만 없는 법.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은 이 길에서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안내표지 리본이나 표지 말뚝들, 출발 및 도착을 확인해 줄 포스트 박스들은 엉뚱한 곳에 있거나 아예 없는 것들이 많았다. 번호순서대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은 길에선 사라져버린 안내표지 찾느라 모두가 땀 흘리기 일쑤였다. 또 번호로 구별되는 길들이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고 몇 개씩 여러 곳에 산재해 시발점이나 종점을 몰라 헤매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들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일들은 많았지만 넷은 똘똘 뭉쳐 무사히 2박3일 동안 약60km를 걸었다.
< 첫날 : 6월3일 >


이 날은 제9회전국동시지방선거 날이었다. 사전투표를 했거나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친 넷은 강화읍 버스터미널에서 오전 9시45분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걷기에 앞서 스템프 박스를 찾아 출발확인 도장을 찍었다. 우리는 강화도를 중앙에서 동서로 횡단하는 5번 길을 걸었다. 터미널에서 고려궁 남문을 지나 서문까지 약1.3km(안내서 표시)는 강화읍 내부 도로와 함께 이어졌다. 그러다 서문을 지나 성곽 안쪽의 벚나무 그늘 길이 끝나는 곳에서 좁다란 개천의 둔치로 계속됐다. 둔치엔 잡풀이 무성했고 가운데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둔치에 난 길을 걸어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그곳에서 길은 끊어지고 안내 리본도 안 보였다. 3차 걷기 시작 30여 분만에 만난 첫 번째 길 찾기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걸어온 길뿐 이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심정으로 왔던 길을 살폈다. 개천 둔치에서 우리가 걸은 것과 반대 방향에 성곽이 개천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리본은 그 성곽의 아치형 통로 세 개 중 왼쪽 통로에 있었다. 수문을 겸한 그 통로를 지나 억새와 잡풀이 무성한 둔치를 5분쯤 가니 2차선 도로와 만났다. 도로 가의 안내판에 국화저수지 방향을 나타내는 글자판도 있었다. 도로를 건너 세 갈래 길에서 또 안내 리본을 찾느라 헤맨 후 마을 길을 걸었다. 10여 분 만에 우리는 상당이 큰 국화저수지의 둑에 올라섰다. 저수지에는 낚시질 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지나가려면 약5분쯤 걸리는 저수지 둑엔 오디가 많이 달린 뽕나무도 있었고 둑 아래모내기 끝난 논에선 벼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둑이 끝나는 곳의 도로 옆 긴 옹벽에는 예쁜 진달래꽃 그림과 함께 “고려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중략>--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적혀있었다. 그 마을 뒷산이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고려산이다. 우리는 그 산 자락을 지나가야 한다. 길은 저수지 수변을 따라 난 포장된 인도로 이어졌다. 가뭄으로 저수량이 줄어 저수지 상류 쪽엔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배낭으로 가린 채 30여 분을 걸어 산길로 들어갔다. 가파른 숲속의 흙길엔 산악 오토바이 출입금지 표시판과 차단용 가로막대들도 많았다. 힘들게 올라가다 12시10분쯤 국화리 학생야영장 근처 세 갈래 길에서 간식하며 쉬었다. 순대, 방울토마토, 과자에 막걸리도 한 잔씩 곁들여 갈증과 피로를 풀었다.




한참을 더 가니 고려산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계단길이 있었다. 그 계단을 비켜서 지나가니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속인 데다 몸을 웅크려야 할 만큼 넝쿨과 잡풀이 무성한 좁은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풀 속에는 야생딸기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생각하며 몇 알 따먹었지만 그 시절처럼 달지는 않았다. 우거진 풀을 헤치고 언덕들을 넘어 10여 분 내려가니 새빨간 장미꽃들이 반겨주는 마을이었다. 마을 길옆 논밭엔 푸르스름하거나 검은 비닐 햇빛 가림막을 설치한 고랑들이 온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유명한 강화인삼 밭이었다. 가림막 아래엔 파랗게 자라는 인삼잎들이 보였다. 해방 전 유명했던 개성 인삼은 남북이 분단되면서 월남한 사람들에 의해 기후조건이 비슷한 강화도로 옮겨졌단다. 지금은 못 가는 개성의 인삼밭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마을을 지나 30여 분을 걷는 동안 주변 마을의 담장들은 붉은 장미나 해당화가 만발해 길손들을 즐겁게 했다. 그 중 어느 집 담장은 짙은 담쟁이 넝쿨로 덮였는데 그 위로 넝쿨장미 꽃들이 흘러넘치는 폭포수처럼 피어있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고려산 능선들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다. 마을을 지나니 길은 야트막한 숲속의 능선으로 이어졌다. 그 능선길에 있는 고인돌들이 잘 알려진 오상리 고인돌군(群)이었다. 숲에 둘러싸인 평평한 곳곳에 7개의 고인돌이 모여있었다. 1개를 제외하고 모두 널찍한 받침돌 위에 그보다 더 널찍한 돌판이 얹혀 탁상 모습이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지난2000년에 발굴 조사한 결과 이들은 청동기 시대 부족장들의 무덤인 지석묘(탁자식 고인돌)이며 이 일대에 12개가 있었단다. 우리가 걸어온 5번 나들길은 고인돌군 앞을 지나는 중앙선 없는 포장도로와 합쳐졌다.




안내서엔 고인돌들을 지나 조금만 가면 17번 길이 갈라지며 그 근처 주차장에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우리는 17번 길 시발점 스탬프 박스를 보지 못했다. 조금 더 가니 5번 길은 2차선으로 포장된 지방도로로 이어졌다. 도로 옆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 리본이나 표시가 없었다. 지도를 펼쳐보니 나들길은 그 저수지 둑을 지나게 돼 있었다. 담수량이 큰 저수지여서 둑도 무척 넓고 길었다. 그 둑엔 만발한 금계국꽃이 노란색 융단처럼 뒤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황금빛 꽃길이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찍은 기념사진에 그 아름다움을 담았다. 높고 넓은 저수지 둑의 경사면 잔디밭엔 ‘한국농어촌공사 고려저수지’라고 흰 글자로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저수지 둑에서 도로로 내려가 걸었다. 그리고 삼거리에서 우리는 5번 길의 종점인 외포리를 향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10분을 지났다. 주변엔 음식점은 물론 민가도 안 보였다. 마침 만난 할머니 두 분에게 물으니 조금만 더 가면 내가면 소재지여서 음식점들이 많단다. 용기를 내어 약 1시간을 더 가서 내가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도로 옆 식당에서 생선구이와 된장찌개로 늦었지만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물론 두어 잔의 소주-맥주 반주도 빠뜨리지 않았다. 음식점 이름이 <내가 거무내 식당>이었다.



식사 후 다시 길을 재촉해 내가면 소재지를 벗어났다. 주변엔 잘 지은 고급 주택들이 많았다. 20분쯤 가니 덕산국민여가캠핑장이었다. 그 옆에 있는 나들길 안내판에 따라 만산봉수대 방향의 산길로 들어섰다. 그 마을에 산다는 어느 남자분의 친절한 설명까지 들은 후 우리들은 신나게 고갯길을 걸어 약20분쯤 만에 고개마루를 넘었다. 약한 내리막 길가에 있는 대규모 양봉장의 알록달록한 벌통들이 이채로왔다. 바로 옆엔 대강당처럼 생긴 커다란 2층 건물 벽에 대형 십자가도 새겨져 있었지만 빈집 같았다. 내리막길을 조금 더 가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예쁜 집도 있었다. 길은 경사가 꽤 급한 내리막 시멘트 포장도로 바뀌었다. 그 길을 내려가니 해안을 따라 난 2차선 지방도로와 만났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 안내표지가 없었다. 벌써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겪었다. GPS앱을 활용해 외포리 방향으로 걸으며 사라진 안내표지를 찾았지만 안 보였다. 산길이 외길이었기에 무심코 걸어오느라 모두가 표지를 놓친 것 같았다. 우리들의 불찰을 탓하며 오르막인 도로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길옆 산자락이나 해안가에 즐비한 예쁜 집들이나 수려한 경치를 즐기며 앞으로만 걸었다. 30분쯤 만에 고개 마루에 도착하니 길 옆 전신주에 사라진 안내 리본이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삼각형의 짧은 변을 놓치고 긴 두 변을 돌아온 셈이었다. 조금 더 가니 외포리 항구의 선착장이었다. 그 때가 5시15분. 도로를 따라 걸은 지 약40분 만이었다. 우리는 멀리 보이는 모텔로 전화해 객실을 확보한 후 여유롭게 종착점을 향해 걸었다.




종점 부근에 있는 삼별초군 호국항몽유적비와 가념조형물 진돗개와 돌하르방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바로 옆의 망양돈대에도 올라 조상들의 호국의지를 더듬으며 첫날 걷기를 마쳤다. 길은 아름답고 보행은 즐거웠지만 사라진 안내표지 찾느라 고생한 날이기도 했다. 모텔 객실을 예약하고 직원이 소개해 준 음식점에서 생선찌개와 구이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식당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객실에서 한잔 더 마셨다. 이날 우리는 2,9000보쯤 걸었다.
< 둘째 날 : 6월4일 >


두 사람씩 방을 나누어 편하게 자고 5시30분쯤 잠이 깼다. 모두의 관심사인 지방선거 개표실황 TV중계를 시청했다. 16개 광역자치단체장과 14개 지역 국회의원 보궐선거 개표현황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 중 서울시장 개표상황은 표차가 수시로 변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우리는 7시쯤 전날 저넉 식사했던 식당에 다시 가서 따뜻한 국물이 있는 백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짐을 챙기러 객실에 들렸더니 그사이 우리의 관심사였던 서울시장 득표상황은 역전이 돼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불러 해안선을 따라 개설된 16번 길의 시발점 창후선착장으로 갔다. 외포리항에서 약13,5km(안내서 표시) 북쪽이다. 해안에 쌓은 방조제의 제방 둑을 따라 똑 바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이 길엔 망월돈대, 계룡돈대, 용두레마을, 황청저수지가 있다. 특히 이 둑길에는 족제비싸리. 해당화, 금계국 꽃이 만발했고 오른쪽엔 석모도, 왼쪽엔 넓은 논이 펼쳐져 경치가 좋았다. 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예보와 달리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전8시30분쯤 창후선착장을 출발해 10분쯤 가니 우리들의 기를 꺾는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타원형의 흰 돌에 검게 ‘한반도횡단울트라마라톤출발점’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엔 ‘강화—308km—강릉’, 맨 아래엔 ‘2011. 09. 21.’ 이란 건립일도 씌어 있었다. 약30년 가까이 마라톤을 즐겨 온 나도 이 비석 얖에선 할 말이 없었다. 비석을 세운 그들의 체력과 지구력이 부러울 뿐이었다.


비석을 지나니 길은 곧 바로 둑길로 이어졌다. 좁은 바다 너머로 석모도가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고 주변에 크기를 달리하는 작은 섬들도 몇 개 보였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안내서에 따르면 선착장에서 용두레마을까지 8.2km는 둑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엔 키가 크지 않은 나무들이 우거져 생긴 터널도 많았고 구간 시점과 종점을 알리는 철제 아치문도 있었다. 아치문에는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이란 문패가 걸려있었다.




길 곳곳엔 만발한 금계국 노란꽃들의 융단이 펼쳐졌고 청순함을 품은 진분홍 해당화들도 푸른 잎 뒤에서 수줍은 듯 피어있었다. 화려한 금계국 꽃에선 발랄한 10대 처녀들의 노랑 저고리가 떠올랐고 해당화 꽃에선 연인을 뭍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섬 처녀의 애달픔이 스며 있었다. 해당화꽃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섬에 드리운 해무가 한 폭의 채색동양화처럼 멋지게 느껴졌다. 왼쪽에 펼쳐지는 광활한 벌판은 강화도의 곡창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싱싱하게 자라는 벼들의 녹색 물결은 오른쪽의 바다 물결과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녹색의 물결과 흐린 날씨로 하얗게 변한 바닷물결의 경계선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계룡돈데는 올라가지 않고 사잔으로만 담은 채 둑길을 계속 걸었다.




창후선착장을 출발한지 약 2시간만에 우리들은 용두레마을앞 논길로 내려왔다. 똑 바로 난 들길 좌우에 펼쳐진 논에서는 벼들이 가을의 풍요를 약속하는 듯했다. 논길을 지나 포장된 도로를 조금 걸어가니 띄엄띄엄 집들이 있는 마을이었다. 길 양쪽에서 우람하게 자란 느티나무들이 서로 맞닿아 녹색 터널처럼 느껴졌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탓에 간식도 할 겸 어느 집 대문 앞 공터에서 쉬었다. 이때가 오전10시40분쯤 된 시각. 초코파이, 방울토마토, 과자에 준비해 간 막걸리도 마시며 쉬었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오는 사람을 만났다. 혼자서 전국의 길을 걷는다는 그는 오늘이 강화나들길 20개 중 마지막 남은 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의 가슴에는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과 휴전선을 따라 걷는 평화누리길까지 걸었다는 표찰(스트랩 키링 : strap key ring)이 모두 걸려있었다. 지방대학교수로 정년 퇴직한 그는 65세라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남은 과자 한 봉지를 선물로 주고 기념촬영도 한 후 큰 박수로 환송했다.




그와 헤어진 후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걸었다. 안내표지에는 16길 종점까지 3.6km가 남았단다. 숲속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강화유스호스텔을 지나 10분쯤 가니 아침에 우리가 출발했던 외포리였다. 시간은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점찍어 두었던 횟집에 가서 강화도 별미 밴댕이 정식으로 정말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느긋하게 즐겼다. 회, 구이, 무침을 함께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즐겁게 걷고 좋은 구경한 후 맛있게 먹고 즐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값도 생각보다 저럼해 금상첨화라고 해야겠다.

식사 후 우리는 16번 길 도착과 4번 길 시작 도장을 찍으려 했지만 스탬프 박스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을 찾기 위해 군청 관계자와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어제 저녁 도착했을 때도 안내서에 적힌 장소로 갔다가 어디론가 이전했다는 주변 상인의 설명을 듣고 포기했었다. 이번엔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싸움은 일행 중 생일이 제일 늦은 사람이 맡았다. 담당자 부재라든가 점심시간 휴무 등의 이유로 대답을 제대로 안 해주자 최고 책임자를 불렀다. 조리 있고 강력한 항의를 들은 팀장이란 사람은 항만공사 때문에 이전하면서 제대로 안내를 못 했음을 사과했다. 그리고 임시로 이전한 장소를 알려주는 것으로 언쟁을 끝냈다. 그것은 강화함상공원 근처 해양경찰 파출소 건물 옆에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3개 코스를 한꺼번에 찍고 4번 길을 2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외포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30여분 걸어 건평항 근처 천상병귀천공원에서 잠시 쉬며 기념촬영을 했다. ‘歸天’이란 詩로 유명한 천상병시인의 좌상(坐像)에 앉아 지나간 군부독재 시절의 엄혹했던 국내상황도 잠시 회상해 보았다. 어려웠던 그 때 그 시대와의 불화와 가난을 안고 힘겹게 살다간 천시인! 그의 좌상 어깨에 앉은 새는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자유 정신을 상징한다고 좌상 조각가 박상희는 오석판(烏石版)에 새겨놓았다. 바다 건너 석모도, 아니 그 너머를 응시하는 좌상 속의 시인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을까?


도보로 2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건평교회의 높이 솟은 하얀 첨탑아 파란 하늘과 대조돼 더 하얗게 보였다. 우리는 교회 바로 옆에 있는 구한말의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이건창(1852-1898)의 묘에도 잠깐 들렸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그는 15살에 문과에 급제한 천재로 암행어사, 예문제학 등을 역임했고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지만 갑오경장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 47세에 생을 마쳤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었다. 그 무덤에서 내려다 본 교회와 주변 마을의 전경은 가히 천하일경이라 할 정도였다.


건평을 떠나 한 시간쯤 가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널찍한 하곡마을 삼거리였다. 피곤도 하고 방향도 찾을 겸 길가 무덤의 잔디밭에서 쉬며 간식과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무덤의 주인 정제두(1649-1736)선생은 참된 지식과 실천의 합치<知行合一>을 사랑한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로 꼽힌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성리학이 종교처럼 여겨지던 당시 형식과 교리에 치우친 성리학에 회의를 느껴 위험을 무릅쓰며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다고 한다. 부총리급 벼슬인 우찬승 등 조정이 내리는 벼슬을 30여 차례나 거부한 채 61세에 낙향해 후학양성에 힘쓴 그의 정신은 훗날 ‘강화학파’로 계승, 신채호 정인보 이건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나 사학자들이 이어받았다. ‘나라의 영토는 파괴될 수 있으나 나라의 혼은 파괴될 수 없다’는 말이 선생의 가르침애서 비롯됐다고 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묘소를 떠나 산길을 40분쯤 걸어 능내리 마을에 도착했다. 흙길 양쪽의 밭에는 잘 손질된 고랑들에서 아직 어린 여름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길가엔 앵두가 빨갛게 익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수령 200년, 높이 18m라는 기품있게 자란 느티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나무 앞에는 나무의 내력 등을 기록한 ‘큰나무’란 입 간판이 서 있었다.



나무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의 큰길가에 4번 길의 스탬프 박스가 있어 도장 찍고 기념촬영도 했다. 이날 걸은 공식거리는 11.5km. 그때가 오후 5시. 내일 걸을 구간의 시간 절약을 위해 우리는 3번 길을 2km쯤 더 걷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조산교회 앞에서 걷기를 중단했다. 주변엔 음식점이나 숙소가 없어 택시를 불러 외포리로 되돌아갔다. 6시쯤 도착한 외포리에서 우리는 어제 투숙한 모텔의 같은 방을 예약했다. 그리고 다시 나와 이틀 전 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에서 반주 한잔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 셋째 날 : 6월5일 >


마지막 날 아침 식사도 같은 식당에서 했다. 같은 숙소나 음식점에서 두세 차례 잠자고 식사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택시 불러 외포리를 출발했다. 하늘은 맑았고 상쾌한 바닷바람은 약간 서늘했다. 어제 걷기를 중단한 조산교회에서 멀지 않은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문에 8시에 도착했다. 지도에는 3번 길이 이 대학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어제 오후 가능 근처의 능내리에서 도착 스템프 찍은 후 조금 더 걸었지만 안내 리본이나 표지 말뚝을 못 찾았다. 그래서 오늘 학교에 오면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우리들의 커다란 착오였다.


교문에 근무하는 수위분에게 지도와 안내서를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3번 길은 학교와는 상당히 떨어진 주변의 산길로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건너편 산자락을 질러서 올라가면 그 길과 만날 수 있다는 그분의 조언에 따라 논둑 길을 지나 그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입구의 산소로 가는 길이 끝나면서부터 길이 없었다. 숲은 우거졌고 우리들의 가슴까지 무성하게 자란 풀들은 발길을 방해했다. 산자락의 경사도 심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월남전 참전 군인들이 정글 속 전쟁터에서 경험했음 직한 풀숲의 미로에서 우리는 힘들게 길을 찾는 고생을 했다.



그야말로 맹지속에서 길을 만들며 악전고투 끝에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넘어 이웃 마을로 들어갔다. 그 마을의 길은 말끔하게 포장돼있었다. 길가에 있는 집의 정원에 나와 있던 아주머니에게 다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비교적 잘 닦인 산길이 있다고 했다. 이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나보다. 산길은 상당히 가팔랐고 숲도 깊었지만 길은 있었다. 아주머니와 헤어져 걸은 지 20여 분만에 우리는 반가운 리본과 안내 말뚝을 만났다. 말뚝 옆 밴치에서 쉬며 물도 마시고 가쁜 숨도 골랐다. 약 한시간 여에 걸친 길 찾기 고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0여 분을 쉰 후 9시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입간판 형태의 안내판에 새겨진 “산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란 함민목 시인의 시가 가슴에 닿는다. 15분쯤 위쪽으로 올라가니 강화석릉(江華碩陵)이 있었다. 안내문엔 고려 21대 임금 희종의 무덤이라고 적혀있었다. 희종은 최씨 무신정권 시절 횡포가 심했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재위 7년만에 폐위됐다(1211년). 그리고 교동도로 유배됐다가 26년 뒤 용유도에서 죽어 이곳에 안장됐단다. 이 석릉은 남한지역에 있는 5개의 고려왕릉 중 하나란다. 그 석릉 옆에 약 100년 전 조선 말기 사람 고재순씨(1846-1916)가 남긴 漢詩 한수를 새긴 사각형 목판이 있었다. 그중 한 행이 獨寒空林月影寒‘이었다. 뜻은 ’빈 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가 차갑구나’란 내용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쫓아낸 사람이나 쫓겨난 사람 모두 한 웅큼 부토로 돌아간 지금 생각하니 諸行無常이란 말이 실감 났다.



석릉을 지나 산길에서 내려오니 아주 멋진 전원주택들이 동남향의 산자락에 마을을 이루었고 앞에는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개천을 건너 5분쯤 가니 도로 옆 큰 교회당 입구에 ‘화장실 사용을 허락해 주겨서 감사합나다’란 푯말이 커다랗게 서 있었다. 교회를 지나 조금 더 가니 길가에 무척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쌍둥이처럼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큰나무>라고 표기된 안내판을 보니 ‘길직리 부부 느티나무’란다. 수령은 300-450년으로 추정되며 키는 18m란다. 특히 설명문 중 ”그늘이 너무 시원해 남자들이 농사철에 일하다 쉬면서 한두 잔 마시던 술이 해 저물 때까지 길어져 농사일을 못 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자 참지 못한 아낙네들이 일했다.“는 구절이 있어 웃었다. 그 옆 전신주엔 서해랑길100코스 안내판도 붙어있었다.



길직리 마을에서 10분쯤 가니 거기에도 큰나무라고 쓴 안내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옆의 나무는 키는 컸지만 앙상한 가지들에 잎도 듬성듬성 달린 볼품 없는 소나무였다. 안내판을 보니 수령 200년쯤 된 이 까치골 나무는 약 40년 전 강화도를 휩쓴 송충이 피해로 울창했던 소나무들이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몇그루 안되는 나무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하루속히 아름답던 옛 모습을 되찾기를 빌어주며 지나왔다.


길은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입구의 안내판엔 3번 길의 종점까지 6km 남았단다. 그 때가 오전 10시10분 쯤 됐다. 야트막한 산의 자락길이지만 숲운 울창했다. 그런데 10여 분을 더 가니 대나무들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 대부분이 잎이 붉게 말라죽은 소나무들이었다. 40년 전의 송충이 피해목들은 아닐 텐데 이유가 궁금했다. 그 솔밭을 지나가니 푸룬 나무들이 들러선 잘 손질된 묘소가 있었다. 망주석들도 여러 개 있었다.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알려진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의 묘였다. 무신정권의 서슬이 퍼런 시기에 활동한 선생은 그야말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선현이시다.



우리는 묘소앞 쉼터 계단의 그늘에서 준비한 간식들을 모두 꺼내 먹으며 쉬었다. 시간은 10시30분. 남은 거리도 얼마 안 된다. 충분히 쉬고 난 우리들은 씩씩하게 전진, 가로로 지나가는 포장된 길로 올라갔다. 세 갈래 길인 그곳엔 바로 옆 왼쪽에 리본이 있었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왼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이것이 이번 3차 걷기의 마지막 길 찾기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곧게 이어지는 외길의 포장도로를 즐겁게 걸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가도 안내 리본이나 말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500m는 훨씬 더 걸은 것 같았다. 이상함을 깨닫고 GPS앱까지 동원해 길을 찾았지만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어 포장도로에 올라선 삼거리 쪽으로 되돌아갔다. 강화군의 부실한 나들길 관리를 비난하면서 삼거리 근처에 있던 그 리본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되돌아가는 우리들의 왼쪽에 예각으로 만나는 좁다란 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길옆에 리본이 걸려있었다. 예각으로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는 있어야 할 안내 리본이나 표지 말뚝을 인 세운 관리자들을 더 욕하면서 우리는 남은 길을 걸었다. 유럽의 어느 농촌을 연상시키는 널따란 풀밭이 있는 곳도 지나왔다. 좁지만 말끔하게 포장된 마을 길도 구불구불 통과했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새파란 하늘을 반사하는 길정저수지와 그 너머의 산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경치도 즐겼다. 그리고 누렇게 익어 추수를 기다리는 황숙기의 넓은 보리밭도 만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봤던 그 보리밭 풍경은 정말 반가웠다.



보리밭을 지나 20여분 만에 우리들은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도착했다. 한국의 기와집이나 고궁 건물을 닮은 한국의 맛을 지닌 특이한 성당이다. 1906년에 건립됐으며 한국전통 건축양식을 한 외형과 달리 내부는 서유럽 건축양식으로 공간을 배분했다고 한다.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등 하루 세 번 종을 울리는데 마침 12시여서 종소리가 종각에서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성당을 떠나 온수리 공영주차장에서 3번 길 완보 도장을 찍었다. 낮12시15분이었다. 근처의 정육음식점에서 삼겹살에 시원한 소주와 맥주를 반주하며 사흘간의 즐겁고도 힘들었던 추억들을 간직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 7월과 8월은 쉬고 9월에 4차걷기를 계속합니다.
< 2026년월12일 기록 >
| 연정25 강릉-주전골 여행 (1) | 2026.05.29 |
|---|---|
| 강화나들길 걷다-2 (1) | 2026.05.18 |
| 강화나들길 걷다-1 (0) | 2026.04.23 |
| 추위 피해 즐긴 후쿠오카 여행 (3) | 2026.01.27 |
| 세계평화의 숲길을 걷다 (1) | 2025.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