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달력상으로는 겨울이었지만 봄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햇살은 따스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다 구두를 신으면서 뒷 굽이 심하게 닳은 것을 발견했다. 쇠뿔은 단김에 뺀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길가의 구두수선 아저씨를 찾았다. 그 아저씨는 50세쯤 되어 보였다.
아저씨는 알루미늄 새시로 지어진 아주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웅크린 자세로 구두를 닦거나 수선한다. 수선을 의뢰한 후 물끄러미 아저씨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아저씨는 자녀들이 몇 명일까? 이 분도 내 아버지와 같은 어려움을 가슴에 담고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이어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설날 대목장날 일이 떠올랐다. 그 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다.
내게는 아버지와 검정고무신에 얽힌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다. 가난이 빚어냈던 웃지 못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설날을 이틀 앞둔 2월 어느 날이다. 그 당시는 4월1일에 신학기가 시작되던 때여서 겨울방학이 끝나도 2월은 정상수업을 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던 무렵, 갑자기 교실 밖 복도에서 큰소리로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키는 작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남들보다 우렁찼다. 복도 쪽에 앉았던 아이들이 일제히 창문 밖을 내다봤고 담임선생님도 놀라서 밖을 내다봤다. 일부 아이들은 까르르 웃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교실 밖 복도를 오가며 나를 부른 건 내가 어느 반인 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아버지를 교실로 안내했다. 그 당시엔 5일마다 한 번씩 장이 섰는데 그날이 마지막 설날 대목장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들 옷이랑 각종 설날 제수용품 장을 보러 읍내에 나오셨다. 그리고 대목장 보러 나온 김에 내 고무신도 수선해주려고 나를 찾아 학교로 오신 것이었다.
물자가 귀하고 가난한 시절이라, 명절이 되어야 아이들은 새 옷을 입고 새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새 옷이라 하지만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몸집보다 몇 치수가 더 컸다. 빠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옷을 해마다 꼭 맞게 입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첫해는 소매나 바지를 접어서 입혔고 다음해는 접었던 부분을 펴면 딱 맞곤 했다. 옷을 살 때는 굳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아도 어림짐작으로 가능했다. 옷과는 달리 신발은 어쩔 수 없이 신겨보고 꼭 맞는 것을 사야했다.
나는 아버지를 본 순간 새 신발을 사주려고 오신 걸로 생각하고 내심 좋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 신발을 사 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 신발이 심하게 닳지 않아서 바닥에 고무만 한 벌 덧대면 한참을 더 신어도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야 새 신발을 사달라고 했지만 가난한 우리 아버지에게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렸던 내가 아버지의 어려운 사정이야 어찌 알겠는가. 새 고무신 한 켤레 사줄 여력마저 없었지만 아들에게 물새는 신발만은 신게 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그때는 몰랐다. 또 그런 궁핍한 사정을 젊은 선생에게 털어놔야했던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나는 몇 달 전 여름방학 직전에 커다란 사고를 쳤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하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그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은 개울에서 신발 한 짝이 순식간에 떠내려 가버렸다. 그 신발은 새로 산지 얼마 안 된 것이었다. 개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며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아버지에게 혼 날 일이 걱정돼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긴긴 여름해도 서산머리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넘어갔다. 함께 놀던 동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나는 한 손에 검정고무신 한 짝을 들고 맨발로 개울가를 오르내리며 신발을 찾고 있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깔려오자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 때쯤 마을 입구에서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혼날 일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있었다.
그러나 내게 다가 온 아버지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말씀을 들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이놈아, 신발은 새로 사면되잖아? 네가 안와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덥석 안아 올리셨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한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집까지 안고 가셨다. 아버지의 품 안이 참으로 편안하고 따뜻했다.
나는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자랐다. 형이 셋이고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그 많은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어야 했던 5척 단구의 가난하고 못 배웠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 가난이 싫고 못 배운 게 한이 돼 자식들을 모두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켰다. 그 때문에 젊었던 시절 자신의 피땀으로 일구었던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밭까지 모두 팔아야만 했다. 이제야 당신의 생을 자식들에게 바친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아버지! 누가 당신을 작고 가난하고 못 배웠다고 하던가요?”
석 인 호(ih0717@hanmail.net)
※ 이 글은 월간 수필잡지 <좋은수필> 2014년 10월호에 게재됐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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