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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님의 歸鄕

단상

by 솔 뫼 2021. 8. 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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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님의 歸鄕


< 다음 글은 제 맏형님에 대한 추모글 입니다. 4년전 쓴 것인데 오늘 자료를 정리하다 다시 읽었습니다, >


2014년11월10일 저녁 형제들이 모여 식사했다. (위 사진 중간이 맏형님 내외)


2015년12월29일 밤9시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마당!
한겨울 밤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그 시각 나는 맏형님의 손을 잡고 기념관에서 나와 삼각지 지하철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81세인 형님은 14살 아래인 내 손이 따뜻해서 좋다고 하셨다. 나도 형님의 온기를 꼭 잡은 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 --------------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7년11월15일!
그 형님이 그토록 가고싶어 하셨던 고향으로 내려 가셨다. 6.25전쟁 전 서울로 유학 온 후 군대복무 3년, 해외근무 4년을 제외하고 계속 서울에서 사셨던 분이다. 이날 형님은 고향으로 완전히 귀향하셨다. 영원한 귀향이시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83세.

형님은 매우 건강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80살을 넘기면서 급격히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동년배 친구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건강하셨다. 물론 크고 작은 병치레를 자주 하긴 했지만 우리들은 100수를 하실 것이라고 여겼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게이트볼, 배드민턴을 즐기셨고 틈나는 대로 자전거도 타셨다.

그러시던 분이 지난해부터 무척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다. 두 아들이 있었지만 그 조카들도 생업에 쫓기다보니 형님의 고향나들이는 뜻대로 되지 못했다. 나와 막내 동생도 형님을 모시고 고향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다 해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3월 형님은 갑자기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으셨다. 고혈압 부작용으로 생긴 ‘대동맥 비대현상’이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고 했다.

그 일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청천벽력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형님은 그 큰 수술을 무난히 견디시고 이겨내셨다.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신 날 우리들은 마음껏 축하와 위로를 해드렸다. 그렇지만 수술하기 전보다는 거동이 훨씬 부자유스러웠다. 그 즈음부터 형님은 전보다 훨씬 강하게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씀 하셨다.

문제는 엄청나게 위험한 수술을 하셨던 분의 건강상태였다. 겉으로야 별 이상 없지만 승용차로 4시간 이상을 가시기엔 위험하다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또 가벼운 치매증상이 있는데다 소변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일도 잦아졌다. 수술후유증으로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형수님은 ‘더 건강해지면 고향에 함께 가자’며 달래시곤 했다. 동생인 나는 가끔씩 전화로 안부만 묻곤 해 형님이 그런 어려움을 겪는 줄은 몰랐다. 형수님의 충고에 따라 형님은 혼신의 힘으로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해오셨다고 한다. 오르지 고향에 가보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다.

내가 형님과 함께 식사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지난 추석 때였다. 온 가족이 모인 날 형님은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 온갖 추억들을 살려내어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막내 동생과 함께 약속드렸다. ‘형님 건강이 조금만 더 좋아지시면 모시고 고향에 가겠다.’고, 마침 올해 3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한 막내가 새 차를 샀기에 그 차로 모시겠다고 했다. 형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3형제가 함께 가게 됐다고 좋아 하셨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을 보면서 헤어진 지 꼭 40일 만인 지난달13일 형님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이틀 전 새벽녘 찾아온 뇌졸중에 쓰러져 말 한마다 못하시고 떠나셨다. 큰 수술도 잘 넘기고 열심히 체력 길러 교향에 함께 가겠다던 분이 그렇게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뭐가 그렇게 급하셨을까?

형님은 그렇게 해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의 선산 부모님 곁에 누우셨다. 형님이 영원히 귀향하시던 날, 운구행렬 차안에서 나는 추석날 오전 그렇게 즐거워하셨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이별의 아픔을 삼켜야만 했다.그리고 2년 전 그 추운 겨울밤에 잡았던 형님의 따스한 손길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이제는 영원히 잡지 못하게 됐다.
대학4년을 형님 집에서 지낸 나에게는 형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형님은 가난했던 집안의 장남으로 한 평생 고생만 하고 떠나셨다.
“형님과 함께 했던 지난 닐들은 행복했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사랑합니다!”
< 2017년12월3일 씀 >


< 추신 >
다음 글은 2016년1월1일 중앙일보 사우회 카페에 게재됐던 것인데 2015년 12월29일 밤 맏형님과 함께 지냈던 이야기입니다.

나의 맏형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크리스마스이브가 생각난다. 그 저녁 나는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읍내로 형님을 따라 걸어갔다. 해는 졌지만 초 저녁때라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신작로에는 그 달빛아래 어슴푸레하게나마 나와 형님의 그림자도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차다고 형님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목도리도 단단하게 여미어 주며 내 걸음에 맞춰 걸었다.

당시 형님은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인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잠시 고향에 다니러 왔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형님은 읍내의 교회에서 벌어진 성탄절 이브행사에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 집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서울에서 공부를 한 맏형님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동생을 밤에 교회에 데리고 가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서 형님은 아버님께 다른 일로 읍내 놀러 가는데 혼자 가기 무엇해서 동생을 데리고 갔다 오겠다고 둘러 댔던 게 기억난다.

우리 형제는 모두 6남매인데 나는 그 중 4남이다. 원래는 여섯째였지만 불행히도 넷째와 다섯째가 어렸을 때 죽는 바람에 내가 넷째가 되었다. 그 때문에 맏형은 나보다 무려 14살, 셋째형도 7살이나 많다. 내 아래로는 세 살 적은 여동생과 여덟 살 적은 막내 남동생이 있다. 2대 독자이셨던 아버지는 슬하에 5남1여를 키워 형제가 없어 겪어야 했던 당신의 외로웠던 한을 푸셨다. 그렇지만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가난과 어려움을 벗하셔야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는 항상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아버지의 어려움을 잘 아는 형님들은 한참이나 어린 세 동생들을 끔찍이도 챙겼다. 그 중에서도 맏형님의 동생사랑은 남달랐다. 서울 유학중 6.25를 당해 시골에 와계셨을 적에 나는 겨우 세 살이었단다. 비행기 소리만 나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나를 업고 달래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다고 형님은 내가 철이 든 후에 곧 잘 들려주곤 했었다. 그래서 나의 형님들, 특히 맏형님은 내겐 어쩌면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에게 항상 엄하게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 동생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이렇게 자애로운 형들이었지만 각각 결혼해서 생활에 매이다보니 자주 만나지도 못하게 됐다. 이제는 모두가 은퇴하고 80고개를 넘거나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가끔 들려오는 맏형님의 병치레 소식에 깜작 깜짝 놀라곤 한다. 더군다나 80을 넘긴 맏형님은 툭하면 넘어져 다치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날 항상 아버지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던 분들이 어느새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상노인이 됐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일이 며칠 전에 일어났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래서 매년 한 차례씩 있는 재경 중학교 총동문회나 송년회 때는 형님들을 만나곤 한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형님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송년회에 정말 뜻밖에도 맏형님이 참석하셨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형님은 혼자서 이런 모임에 나오시기엔 너무 위험한 일임을 나는 잘 안다. 밤 시간인데다 형님 댁과는 너무도 먼 곳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모임인지라 선배들부터 식사를 하게 하느라 우리들은 뒤늦게 음식을 담아 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식사를 일찍 마치신 형님이 피곤하다며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천천히 놀다가라며 나서는 형님을 따라 나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걱정 없다고 말씀 하시지만 나는 그것이 무척 위험한 것임을 안다. 모임장소를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역까지 형님의 손을 잡고 걸었다. 형님의 온기가 내 손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형님은 오히려 내 손이 따뜻해서 너무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지하철4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삼각지역은 복잡한데다 환승통로가 길어 80넘은 노인이 혼자 갈아타기가 쉽지 않다. 나는 형님의 손을 잡고 창동역 근처 형님 댁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마침 걱정이 돼서 전화하는 형수님도 안심시켜 두었다. 우리들은 창동역에서 내려 다시 10분쯤을 손잡고 걸었다. 실로 몇 십 년 만에 이렇게 긴 시간동안 잡아보는 형님의 손인가? 형님은 비슷한 옛날이야기를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하셨다. 무척 신이 나신 것 같았다. 나는 말 못할 슬픔이 치밀어 올라 가슴속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도 듬직하고 정다웠던 분이 벌써 이렇게 된 사실이 까닭 없이 서러워졌다.
‘형님, 아우와 손잡고 가는 길이 그리도 즐거우세요?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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