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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을 걷다 - 6차 A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2. 11.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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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먼 산길에서 가을비 맞고
한적한 길엔 고향의 정취가 듬뿍


< 2022년10월24일-27일 >
◇ 강릉 옥계해변∼강릉 안목항
< 첫째 날 >


이번 여정 나흘 중 절반은 비 오는 산길과 들길이었다. 10월 하순이었는데도 오뉴월 장마철을 능가할 만큼 계속 비가 내렸다. 게다가 해파랑(海波浪)길이란 이름과 전혀 동떨어진 내륙의 산길과 들길을 이틀이나 걸었다. 그랬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루는 찬란한 일출과 구름 한 점 없는 날을 허락 받는 행운을 누리기는 했다. 이래서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다는 말이 생겼으리라.

10월24일부터 3박4일간 동해의 해파랑길 750여km 중 강릉 옥계해변에서 양양 수산항까지 약115km를 걸었다. 이번 여정은 지난3월 시작한 후 여섯 번째 걷기였다. 동해안을 따라 탁 트인 바다와 굽이치는 파도, 잔잔한 물결을 아우르는 길인만큼 곳곳에서 절경이나 비경들을 만났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구간은 비교적 단조로웠다. 그렇지만 기암괴석 너머로 전개되는 만경창파는 여전히 좋았고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는 아침 해의 장관엔 피로를 잊었다. 뿐만 아니라 강한 바닷바람에 맞서 푸름과 곧음을 잃지 않는 울창한 송림들과의 만남은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남았다. 장거리 도보여행길위에 서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아침7시20분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한 KTX열차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정동진을 향해 달렸다. 이처럼 맑았던 날씨는 태백산맥을 지나면서 흐려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해안지방의 비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던 염원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동진역에 내리니 센바람을 타고 빗방울도 떨어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지난달 걷기를 중단했던 옥계해변의 한국여성수련원 입구까지 약10km를 남쪽으로 내려갔다. 바람은 더 강해졌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택시기사에게 부탁해 넷이 기념촬영 하고 9시35분부터 걷기 시작했다. 배낭 비닐커버를 씌우고 우산 쓰고 우의도 입었다.


바람이 예상외로 찬데다 비도 본격적으로 내려 장갑을 끼고 걸었다. 그렇게 30분쯤 가다 금진해변의 아늑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덥혔다. 해파랑길 여행 중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차 마시며 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시 비바람을 벗 삼아 금진항의 헌화로 해안도로에 도착했다. 길가엔 수로부인의 설화와 헌화가(獻花歌)가 새겨진 책모양의 석조조형물이 있었다.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강릉태수 순전공의 부인이다. 헌화가는 수로부인에게 언덕아래 핀 예쁜 철쭉꽃을 따다 준 소 몰던 노인과 부인을 납치해 간 해룡 등의 설화와 함께 전해진다. 조형물 건너편 언덕엔 주변 경관을 모두 가릴 듯 크고 높게 솟은 탑스텐 호텔이 위압적으로 서있었다. 호텔건물이 하도 커서 아주 멀리 떨어진 해변이나 산위에서도 보였다. 예쁘게 봐주면 ‘랜드 마크’이겠지만 내게는 거대한 사각형 흉물처럼 느껴졌다.


헌화로 해안도로는 걸어서 30분 거리인 심곡항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지도상의 해파랑길을 조금 벗어나 해안절벽의 절경을 끼고 개설된 바다부채길을 걸었다. 이 길은 유료이지만 신분증 확인 후 경로대상자는 무료로 통과시켜 준다. 입구에서 직원에게 부탁해 기념촬영 후 정동진까지 멋진 절경을 감상하며 걸었다. 기묘한 절벽들과 하얗게 밀려오다 바위에 부딪쳐 부채처럼 허공으로 펼쳐져 흩어지는 멋진 파도가 길손들의 발목을 잡았다. 일부 구간은 새로 보수하고 조금씩 길을 변경해서 더욱 안전해졌다. 부채길은 정동진항 남쪽 언덕의 명물 썬 크루즈 리조트 마당에서 끝난다. 이 리조트는 거대한 크루즈 여객선 모양의 호텔이다. 부채길 마지막에서 리조트로 오르는 구간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다. 이 때문에 현재 정동진항 쪽으로 완만하게 연결되는 데크 연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전 구간이 나무 데크로 약 한 시간쯤 걸린다.


리조트에서 내려오면 다시 해파랑길과 만난다. 우리는 정동진항 입구 음식점에서 해물 칼국수와 막걸리로 점심을 먹었다. 친절한 사장내외의 정성과 손맛이 담긴 푸짐한 칼국수는 찬 가을비에 젖은 길손들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두부도 일미여서 더 달라고 했다. 음식점에서 가까운 정동진역 모래시계공원엔 새천년 모래시계탑과 증기기관 화차와 객차를 이용한 ‘정동진 시간 박물관’이 비에 젖고 있었다. 그리고 맑은 날엔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레일 바이크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정동진역 앞 도로를 건너 괘방산 산행로 입구에서 36구간을 시작하는 스탬프를 찍었다. 길은 가파르게 산으로 올라가 능선 길로 계속됐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해안의 길이었던 것과 달리 바다가 전혀 안 보이는 산길이 계속됐다.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좁은 산길은 빗물이 고여 흐르면서 작은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높이는 죄고점이 183m이지만 거리가 무려 9.4km다. 36구간 전구간이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이었다. 야트막한 능선 길에 생긴 도랑에 흐르는 빗물을 밟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밋밋한 능선의 흙탕물길을 장마철같은 비를 맞으며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숲은 무성했지만 별로 볼만한 경치는 없었다. 산행로 입구에서 30분쯤 올라간 곳에 있는 183고지 갈림길의 안내판엔 정동진역까지 1.5km라고 적혀 있었다. 구간 종점인 안인항까지는 당집과 페러글라이딩 활공장 외엔 그냥 구불구불하고 특색 없는 빗길의 연속이었다. 183고지에서 한 시간쯤 가니 당집이 있었다. 거기에서 40분쯤 더 가니 삼우봉 이정표가 나왔다. 종점인 안인항까지는 2.9km라고 표기돼 있었다.


삼우봉 근처에서는 하얀 운무 너머로 조금씩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리는 질척거리는 산길을 땅만 보며 한 시간쯤 더 조심조심 걸어 안인항에 도착했다. 비는 지겹게도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 구간은 해파랑길이라 하기 보다는 육파릉(陸坡陵)길이라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때가 5시였고 비맞으며 20km쯤을 걸어 온 후였다. 더 갈 수도 없어 숙소를 수소문해 여장을 풀고 바로 옆 음식점에서 오징어볶음과 생선구이로 저녁식사를 했다.

< 둘째 날 >


다음 날 아침 다시 그 집에 가서 백반정식으로 식사를 하고 7시부터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동쪽 하늘엔 붉은 아침노을이 구름사이로 멋지게 비치고 있었다. 숙소 앞 해안을 지나는 동해선 철로 위로 난 안인일출교를 지나 해안도로를 걸었다. 하늘 높이 솟은 해가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찬란한 햇살을 비쳐주기도 했다. 근처에 서있는 안인진리 비석의 글귀가 마을이름을 설명해주었다. 월드컵4강 기념으로 세운 비석엔 “安仁! 예부터 편안하고 착한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새겨져 있었다.


비석을 지나자 길은 내륙의 모전리 들판으로 이어졌다. 영동에코발전본부 공장의 고동색 지붕이 들판을 가로지른 넓은 개천 너머에서 아침햇살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화력발전소인 듯하다. 개천주변의 추수가 끝난 논들은 어제 내린 비로 물이 가득했다. 뚝방 길에 서있는 감나무들은 주황색 감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50분쯤 걸어 들녘 끝의 산자락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커다란 자연석에 ‘둔지마을’이라 새긴 표지석이 있었다. 어느 집 마루에 수북이 쌓인 늙은 호박들과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들에서 고향의 정취를 흠뻑 느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로 만든 이정표엔 200m 거리에 곶감과 능이버섯이 유명한 ‘정감이마을’이 있다고 씌어 있었다.


우리는 정감이마을 둥산로를 따라갔다. 등산로 입구엔 ‘이 곳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이루어진다’는 유래를 설명한 안내판이 있었다. 우리들처럼 70대들에게도 그런 효험이 있을까? 약 한 시간 50분이나 걸린 등산로는 경치가 좋은 울창한 숲길이었다. 그렇지만 도중에 있는 마을들 주변의 산과 밭에 대규모로 설치된 태양열 집열판들이 좀 거슬리긴 했다. 그런데 산길 중간쯤을 지날 때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또 우산과 비옷을 챙겨야 했다. 비는 30분쯤 계속됐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개천에 걸린 다리가 ‘동막아래1교’, 근처엔 동막저수지도 있었다. 그 앞의 넓은 들판은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똑 바른 격자형 농로를 따라 펼쳐지는 마을들엔 감나무, 모과나무가 잘 익은 열매를 뽐내고 있었다. 그 들판 한편에 있는 유명 커피브랜드 테라로사 공장 마당엔 승용차들이 빽빽하게 서있어 강릉이 커피 도시임을 실감케 했다.


커피공장을 지나 학산2리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 했다. 20분쯤 더 가니 통일신라 말기의 대찰 굴산사 터에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86호) 돌기둥 두 개가 가랑비 내리는 들판에 우뚝 서있었다. 비록 무정물이지만 전성기의 영화를 잃고 일천년의 풍상을 꿋꿋이 견디어 온 돌기둥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거기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학산1리 오독떼기 전수관앞에서 38구간 시작 스탬프를 찍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건넜던 학산교를 다시 건너 강릉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아침부터 5시간째 걸었기에 배가 고팠다. 길은 평탄한 들판으로 이어졌지만 근처에 식사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길가 감나무에 달렸거나 잘 익어 떨어진 감들 몇 개로 요기 하며 30여분 걸어 강릉시구정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주민이 알려준 막국수 집을 찾아 1km나 갔지만 휴업이었다. 다시 면사무소까지 되돌아 와 들어간 강보리밥 집은 제대로 된 ‘맛집’이었다. 오후1시가 넘은 데다 시골이었는데도 대기표를 받아 20여분을 기다렸다가 좌석을 배정받았다. 그렇게 해서 먹은 돼지고기볶음은 정말 맛이 있었다. 안주가 좋으니 반주는 당연지사.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들길을 걷다보니 무척 넓은 저수지가 나왔고 수변엔 고풍스런 기와집 한 채와 김장채소밭들이 있었다. 그 집을 지나 산길 초입 과수원의 울타리 밖으로 잘 익은 사과들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그 중 두 개를 깎아 먹으며 아픈 다리를 쉬게 했다. 나무에 달렸거나 떨어진 익은 과일들이 방치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과수원을 지나 아트막한 산길을 한 시간 가량 걸어 모산봉에 도착했다. 재앙을 막아준다는 강릉의 安山 모산봉은 강릉을 떠받치는 4개산 중의 하나다. 아기를 안은 엄마를 닮아 모산으로도 불렸다는데 이 산을 보고 집을 지으면 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이 모산봉엔 특이한 비석이 하나 서있다. 조선 중종대의 강릉부사가 강릉에선 권문세족이 더 못 나오게 지기를 끊으려고 1508년 봉우리를 1m가량 파서 낮추었다고 한다. 그 후 약500년만인 2005년6월 끊어진 지기를 되살리려고 주민들이 다시 흙을 덮어 높인 후 세운 비석이란다. 모산봉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와 남대천을 건너 강릉단오공원, 중앙시장, 월화정을 구경했다. 길은 노암터널을 통과해 한적한 곳으로 이어졌다.


약간 오르내림이 있는 시골길 같은 포장도로가 이어졌다. 물집이 생긴 발의 고통이 만만치 않았다. 길가 둔덕에 기대 물도 마시고 간식도 하면서 한 시간쯤을 더 걸어 강릉 남항진에 도착했다. 거기서 10분쯤 걸어 솔바람다리에서 39구간 스탬프를 찍었다. 그리고 다리건너 강릉 커피거리로 유명한 안목항에서 6시에 숙소를 잡았다. 이날 우리는 약35km, 51,000보를 걸었다. 무척이나 친절한 모텔사장이 소개해 준 식당에서 식사하고 객실에서 맥주 한 캔씩을 더 마시며 둘째 날 걷기를 마감했다. 그야말로 바다와 동떨어진 육파릉(陸坡陵)길을 비 맞으며 걸은 이틀이었다. 내일은 맑은 날과 멋진 일출을 보리라 기대하며 단잠에 빠졌다.


 

< 해파랑길을 걷다 - 6차 B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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