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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을 걷다 7차-A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2. 11. 2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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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바라보며 분단의 아픔을 절감
영랑호낙조·송지호·화진포절경 만끽


천리를 넘어 이 천리도 멀다않고 걸어 온 결과 치고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갈 수 없는 슬픈 산 때문이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늦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는 금강산의 동쪽 자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민족 모두의 가슴에 담겨있는 聖山 금강산이 우리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딛고 선 언덕 아래 펼쳐지는 넓지 않은 벌판을 지나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 한발을 담근 금강산 동쪽자락 낙타봉 뒤편엔 명승 해금강의 바위들이 파란 동해의 물결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 낙타봉에서 남쪽까지 하얗게 이어지는 모래밭 명사십리와 그 모래밭 한가운데서 바다로 한 발 들어간 밤섬도 어서 오라고 부른다. 우리는 언제쯤 저곳을 막힘없이 가 볼 수가 있을까? 먼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 더 가고 싶고 갈 힘도 남아 있는데…!

< 첫째 날 >

11월16일 아침 7시30분 서울동서울버스터미널을 출발했다. 하늘은 가을비를 한 바탕 쏟을 듯 흐렸고 안개도 자욱했다. 한강변 올림픽대로에서 바라보는 서울모습조차 희미했다. 그렇게 짙었던 안개였지만 버스가 소양호 상류와 한계령 근처를 달릴 때는 걷히고 주변의 산들이 안개 너머에서 동양화처럼 다가왔다. 안개는 사라지고 파란 하늘과 함께 남설악의 준봉들이 좌우에서 웅자(雄姿)를 뽐내고 있었다.


구절양장처럼 굽은 길을 달려 버스는 정확히 10시40분에 우리들을 양양버스터미널에 내려주었다. 흐렸던 하늘은 파래졌고 바람은 살랑살랑 기분 좋게 볼을 스쳤다. 우리들은 택시로 지난달 걷기를 중단했던 양양군 수산항 근처 문화마을 버스정거장으로 갔다. 걷기에 앞서 근처 과일장수 할머니에게 지난달 주지 못했던 과일 값을 치르려했지만 굳이 안 받겠다기에 판매중인 음료를 사는 걸로 대신했다.


늦가을 햇살이 곧게 뻗은 4차선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우리도 그 볕을 등지고 북쪽으로 걸었다. 오른쪽 솔숲언덕엔 바다전망이 절경이라는 솔비치 아쿠아월드 건물이 날렵한 모습으로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도로 오른쪽엔 울창한 송림들이 한없이 길게 이어져 동해의 강한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길 오른쪽 해안엔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진 많은 해수욕장들이 이어지고 있다. 거기서 10분쯤 더 걸어 우리는 연어들의 고향 남대천의 낙산대교를 건넜다. 약1km 거리에 유명한 낙산사가 있다. 바다처럼 넓은 남대천을 건너니 길은 해맞이길로 이어진다. 근처 낙산해수욕장주변엔 유명 호텔이나 대규모 리조트들이 많다.


남대천을 건넌지 50여 분만에 낙산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절주변의 야트막한 언덕이 오봉산이다. 낙산사와 함께 부근의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만경창파는 보는 이들의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바다를 향해 우뚝 선 해수관음상도 유명하다. 20분쯤 더 가니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후진항 비치마켓 선전탑이 눈길을 끈다. 또 10여분 거리의 정암해변엔 몽돌과 고사목 가지, 막대기등 재활용품들로 만든 조형물이 이채로웠다. 해변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리는 파도가 몽돌사이를 지나갈 때 내는 소리다. 그래서 길 이름이 몽돌소리길이 됐다. 해수욕장 북쪽 멀리 보이는 대포항과 외옹치 바다향기로, 언덕위의 하얀 롯데리조트 모습들이 그림처럼 예뻤다.


몽돌소리길 북쪽의 물치천(沕淄川)을 지나면 설악 해맞이공원이다. 왼쪽에는 설악산의 준봉들이 이어진다. 물치해변 공원의 피라미드를 닮은 하얀 안내탑과 그 옆 물고기 모양 안내탑도 예뻤다. 오후1시를 지나 배도 고프고 피곤해 길가의 매운탕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문이 잠겼다.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이 집은 여름에만 하니 자기를 따라오라’했다. 그 아주머니는 뒷골목을 한참 들어가 영업중인 집을 가르쳐 주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넉넉한 인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물치항과 이름이 같은 그 식당에서 매운탕에 막걸리 반주 곁들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푸짐한 식사 후 길가 대형 물치 조형물의 전송을 받으며 쌍천교, 대포항을 지나 외옹치 바다향기로를 걸었다. 롯데리조트 아래 해안절벽을 따라 설치된 이 나무 데크 로드는 내가 자주 찾았던 곳이지만 걸을 때마다 절경이었다. 해파랑길은 외옹치해수욕장을 지나 속초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외옹치라는 지명은 원래 대포항에서 속초로 가는 길목의 고개인 밭둑재였으나 발음이 독재로 변했고, 훗날 7번국도가 개설되면서 ‘바깥의 독재’란 뜻의 한자 외옹치(外瓮峙)로 고정됐다고 한다. 쌍천교를 건너니 속초시가 세운 오색의 영문 이정표와 설악 해맞이공원 표지석, 하늘 높이 솟은 인어상 등이 반겨준다. 대포항 입구 3층건물 옥상의 대형 대게상도 볼만했다.


속초해수욕장 모래밭에 설치된 각종 물고기 조형물들과 수직으로 서서 돌아가는 중앙광장 부근의 대형원형관람차가 길손들을 유혹한다. 해수욕장을 지나 청초호와 바다가 연결되는 곳에 놓인 설악대교를 지났다. 그런데 해수욕장과 청초호 주변엔 6.25후 월남한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아 ‘아바이 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그 곳의 여러 조형물들 중 특히 눈길을 끄는 동상이 있었다. 1990년3월1일 제주도 서남쪽 370마일 동지나해에서 풍랑을 만나 마지막까지 무전기로 구조 통신을 보내 동료선원21명을 구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은 602하나호 선장 유정충(劉禎忠)선장 동상이었다. 그의 살신성인 희생정신에 진심으로 머리를 숙였다. 우리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 높다란 설악대교와 그 북쪽의 금강대교를 건너며 발아래 펼처지는 속초항과 청초호, 그리고 항구입구 언덕 속초등대의 멋진 조망을 즐겼다.


다리북쪽 동호항, 동명항, 속초등대를 지나니 영랑호와 바다가 연결되는 곳에 놓인 영랑교 삼거리였다. 마침 석양 무렵이라 해는 설악산 준봉들 한발쯤 위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영랑호반을 걸으며 호수에 비치는 석양을 맘껏 감상했다. 한 바퀴 다 돌면 7.8km이지만 호수 가운데 가설된 부교식 다리 ‘영랑호수윗길’을 건너 절반만 걸었다. 지난봄에 개설된 명물인 이 부교는 호수의 수위에 따라 높이가 변한다. 다리 중간의 원형광장에서 바라본 설악산 낙조는 정말 ‘장엄한 절경’이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금강산에서 연마한 무술을 검증받으러 경주(금성) 무술대회에 가던 신라화랑 영랑이 이 절경에 반해 무술대회까지 포기하고 머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잔잔한 호수와 설악산 울산바위, 물속에 잠긴 범바위 모습은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낼 것이다.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 호수를 떠나 영랑교 부근 음식점에서 젊은 사장부부가 제공하는 푸짐한 물회로 늦은 식사를 했다. 잠수부가 채취해오는 자연산으로만 차린다는 음식은 정말 일미였다. 물회로 사용한 생선들 이름도 마느미, 돌삼치, 상대 등 특이 했다. 다만 농어, 대왕문어, 감성돔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식사 후 우리는 택시로 설악산 한화콘도로 달려가 피곤한 몸을 쉬었다. 이날 우리는 약 27km를 걸었다.


< 둘째 날 >


바다와 산에서 불어오는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웅장한 울산바위의 환송을 받으며 어제 걷기를 중단한 영랑교 북단으로 갔다. 어른 키 높이만큼 솟은 아침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 가다 장사항 입구 식당에서 백반정식으로 식사하고 근처 포스트에서 46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었다. 기온도 따뜻해 겉옷은 벗어 배낭에 넣고 10여분쯤 가니 속초시와 고성군의 경계였다.


이정표에 씌어있는 글을 보니 최북단 지역임이 실감났다. 약간 붉은 고동색 이정표엔 ‘여기서부터 금강산입니다. 금강산 고성군’이라고 씌어 있었다.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금강산이 있는 고성군으로 들어갔다. 경계를 넘자마자 예쁘장한 3층 건물 찻집이 보였다. 건물 옆 해변솔밭엔 낮은 원탁과 의자들, 잘 손질된 꽃밭까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간에 잘 알려진 비다정원 이었다. 우리들은 몇 장의 사진만 찍고 계속 걸었다. 평일 이른 시간이어서 자동차들이나 오가는 사람들도 없는 조용한 길이었다. 길의 방향에 따라 우리들의 그림자도 전후좌우로 이동하면서 따라왔다.


20분쯤 더 올라간 봉포 바닷가 켄싱턴 설악비치 마당에 새빨간 2층 버스 한 대가 전시돼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2005년12월9일 운행이 중단된 영국 런던의 명물 시내버스 ‘더블 데커’란다. ‘British Double Decker’라는 영문설명도 적혀 있었다. 이 버스의 정식이름은 루트마스터(Routemaster)인데 원형 그대로 들여온 것이란다. 해변 모래밭 데커 길엔 알록달록한 색상의 동물상들이 한 줄로 늘어서 길손들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봉포항 방파제벽에도 모자이크 문양 바탕에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천진해변의 예쁜 안내판과 사각 사진틀 모양의 조형물들도 눈길을 끌었다. 해수욕장 옆 길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배가 많이 나온 젊은 남자사장에게 부탁해 넷이 함께 기념촬영 후 다시 길에 섰다.


길가 건물의 ‘머구리집’이란 간판에서 잠수부들이 많은 바닷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건물 뒤 바닷가에 악어를 닮은 커다란 바위가 눈길을 끌었다. 악어바위 근처 해변언덕 솔숲에 2층 누각 정자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일출명소로 알려진 강원도 문화재 청간정(淸澗亭)이다. 1560년에 처음 보수기록이 있는데 1881년 소실됐다가 1928년 재건 됐지만 6.25때 부서진 이후 지금까지 세 차례나 보수했단다. 현판 글씨는 이승만대통령의 친필이어서 뜻이 깊다.


청간정 부근 아야진 모래밭에 하얗게 내려앉은 갈매기 떼가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빨간 아야진 등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방파제 부근의 물결문양 모래밭도 이색적이었다. 뱀처럼 바다로 길게 벋어나간 바위에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몰려 있었다. 주민에게 ‘고기 잘 잡히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고기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라고 해서 웃었다. 이 모든 것이 절경들이었다.


아야진을 지나 동해대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모래밭에 깔린 나무 데크의 이정표에 평화누리길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길은 2011년 인천 강화군에서 접경지 비무장지대를 따라 통일전망대를 거쳐 속초시 경계까지 이어지는 보행 및 자전거길’이란 설명도 붙어 있다. 바닥엔 ‘군순찰로’란 노란색 글자가 크게 씌어 있어 접경이 가까워졌음이 실감난다. 그랬지만 우리들이 보기엔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모래밭 데크에서 2차선 국도로 들어오니 길 양쪽에 단단한 사각형 시멘트 구조물들이 여러 개 버티고 서있었다. 흔히 말하는 탱크저지선이다. 다시는 여기서 적 탱크와 교전하는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빌며 통과했다.


길은 울창한 송림이 있는 야산으로 올라갔다가 동해의 절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천학정으로 내려왔다. 정자 아래에서 문암항의 하얗고 빨간 등대가 손짓한다. 천학정을 떠나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아담한 문암항에 도착했다. 바로 옆에 기암괴석들이 길게 늘어선 능파대가 자연이 만든 방파제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 경관을 감상하려고 올라가 능파대 끝까지 갔지만 낭떠러지여서 다시 올라갔던 계단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문암대교를 건너 백도항을 지나니 광활한 모래밭 왼쪽 솔숲에 자작도 캠핑장이 있었지만 늦가을이라 텅 비었다. 오른쪽의 해수욕장도 가을햇볕만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모래밭 가운데로 난 4차선도로를 막고 공사 중인 구역을 지나 삼포해변에서 왼쪽의 국도로 들어갔다. 늦가을 한나절 빛이 따가웠지만 송지호해수욕장까지 계속 되는 국도변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해수욕장 입구 길가 음식점에서 수육과 빈대떡에 막국수로 푸짐한 식사를 즐겼다. 물론 몇 잔의 반주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인 엄마는 매우 상냥했지만 아들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송지호(松池湖) 옆으로 계속되는 똑바른 호반 길을 걸었다. 한낮의 해가 호수의 잔잔한 물위에 긴 꼬리를 드리운 채 반짝이고 있었다. 송지호는 바다바람에 날려 와 쌓이는 모래가 만든 언덕 때문에 생긴 석호(潟湖)다.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송지호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길고 곧은 호반 길은 6.25전까지 동해북부선(북한의 안변~양양간 운행) 기차가 달렸던 폐철도부지다. 길옆의 단선철도 궤도조형물과 송지호역 간판만이 그 시절을 말해 주는 듯 했다. 함께 씌어있는 ‘우리는 하나’라는 영문 'WE ARE ONE', 그리고 궤도 옆에 세운 주요 외국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언젠가는 꼭 갈 수 있어야 할 길이기에 그랬다.


송지호 전망대와 그 주변의 평탄한 호반 솔밭 길, 산과 호수가 맞닿은 사이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시골길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절경이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길을 한 시간쯤 걸어 고성왕곡마을(죽왕면 오봉1리)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국가민속문화재’로도 지정된 이 마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고려에 충성했던 강릉 함씨 일가가 들어와 이룬 씨족마을이다. 주변 다섯 개 봉우리와 송지호가 보호해주는 지형에 50년에서 최고 180년 된 전통한옥들이 모인 관광명소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섞인 전형적 시골마을인데 마당에 널린 곡식과 담장 곁에서 익어가는 과일들을 보며 진한 향수를 느꼈다.


왕곡마을을 지나 동해대로 건너 공현진 해변으로 갔다. 거기엔 지난 시절 우리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사우가 경영하는 전망 좋고 아담한 펜션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남은 여정 이틀 밤을 묵기로 했다. 우리들이 펜션에 도착하니 서울에서 하던 일마저 쉬고 내려온 사우이자 사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오후3시10분이었다. 그가 준비한 차와 과일을 들며 30분쯤 쉰 후 다시 걸었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더 걷다가 펜션으로 돌아와서 자기로 했다. 가진항에서 시작되는 48구간 확인 스탬프를 찍고 계속 북쪽으로 걸었다. 공현진에서 가진항까지는 한적한 해변길이다. 포장된 2차선 국도였지만 차량들은 없었다. 도로 왼쪽 언덕엔 지난날 동해북부선 열차가 다녔던 터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진을 지나도 한적하고 똑 바른 국도가 한없이 이어졌다. 언젠가 북행길이 뚫리는 날엔 교통량이 폭주하는 나라의 대동맥이 되리라.


한적한 도로 왼편의 벌판 너머로 저녁 해가 비스듬히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가다 남천교를 지났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 시간 이상 남아있어 북천교까지 더 걷기로 했다. 남천교를 건너니 도로는 텅 비었는데 진입금지란다. 이유는 모르겠다. 해파랑길은 방금 건너 온 남천교 아래를 지나 동호리해변으로 이어졌다. 조그만 공원의 안내판엔 갈대가 많았고 호수가 많은 동쪽마을이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했다. 이지러진 하트 모양의 하얀 조형물이 석양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우리는 공원을 지나 방풍림 해송들이 길게 늘어선 흙길을 20분쯤 걸어가다 다시 포장된 국도로 나왔다. 조금 전 우리의 진입을 막았던 그 도로였다.


그 도로 옆에는 세 개의 날개가 달린 풍력발전기를 닮은 기둥들이 줄지어 서있고 기둥마다 아래엔 풍차모양의 작은 집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니 널따란 개천 북천이 나왔다. 해파랑길은 개천의 둑을 따라 왼쪽으로 이어졌다. 5분쯤 가니 입구 양쪽에 뾰족탑이 있는 긴 다리가 나왔다. 안내판을 보니 옛날 동해북부선이 지나던 철교 북천교란 설명이 있었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서 들판의 일반국도에서 걷기를 중단했다. 해가 지기시작하고 있었다. 숙소로 정한 펜션의 사장이 근처에서 승용차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성이 고향인 사장은 승용차에 우리를 태우고 그의 고향 애기를 들려주며 공현진 펜션으로 갔다. 그가 안내한 음식점에서 맵지 않은 생선탕에 약간의 반주로 배불리 식사했다. 그리고 펜션 안채 거실에서 사우이자 사장이 차린 술상에다 쇠고기까지 곁들여 또 한 차례 술을 마신 후 둘째 날 일정을 마쳤다. 이날 우리는 약31km를 걸었다.

 

< 해파랑길을 걷다 7차-B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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