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비
짙은 안개 속엔 포근함 있고
진눈깨비 흩날림에선 생동감
며칠전 겨울이 잠시 집을 비웠던 사이 찾아 온 비가 봄을 재촉하려는 듯 사흘이나 내렸다. 혼자 오기가 쑥스러워 그랬는지 안개까지 몰고 왔었다. 첫날엔 짙은 안개 속에 숨어서 아주 보드라운 안개비 모습으로 오는 듯 마는 듯 내렸다. 영하10도를 오르내리며 몰아치던 한파까지 데리고 겨울은 어디를 갔단 말인가? 갑자기 아침 기온이 5-6도까지 올라 이른 봄날처럼 느껴지니 실감이 안날 지경이었다.
그날 아침 한강가의 야트막한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니 서울 도심은 하얀 안개에 덮여있었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 위로 가까이 있는 몇몇 키 큰 건물들만 희미하게 보였다. 평소 서울 외곽을 둘러싸고 위용을 자랑하던 관악산, 청계산,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남한산 등도 안개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던 해도 안 보인 데다 아침노을조차 안개가 삼켜버렸다. 소리 없이 얼굴에 닿는 안개비에선 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겨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공간에서 그렇게 내리던 비는 밤이 되면서 가랑비로 변했다. 비는 그 다음날에도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우산을 받기엔 약했지만 그냥 맞고 있자니 옷이 젖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은 있지만 그 보다 약한 보슬비나 안개비에도 옷은 젖었다. 다만 한낮 기온이 영상 12-13도를 오르내린 탓에 2월말이나 3월초순의 이른 봄날처럼 느껴졌다.
작은 우산 하나 접어서 들고 남산 길을 걸었다. 안경에 닿는 작은 빗방울들이 하나 둘 늘어 앞이 흐려지면 손수건으로 닦고 걸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채로 바짝 말랐던 잎새들은 이틀이나 오락가락한 겨울비를 머금어 다시 원래의 단풍잎 모습과 색깔로 변해있었다. 1월 중순에 보는 한겨울의 단풍이라고 해야겠다. 한겨울 눈밭에서 죽순을 구했다는 동화책속 효자얘기는 들었지만 한겨울 단풍놀이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가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면 우산을 펼쳐야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봄날 같은 한겨울 날의 산길이 정말 좋았다. 물론 아내와 함께 한 산책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 되면서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집을 비우고 나갔던 겨울이 외출에서 돌아오는 소리인가 보다. 그를 알리려는 기상청 예보가 잇따라 나왔다. 기온이 급강하 하면서 강원도 산간 고지대에는 폭설이 예상되고 다른 곳에도 적지 않은 눈이 내릴 것이란다. 아울러 동장군의 위세가 살아나면서 길에 얼음이 얼어 위험해진다는 안내도 뒤따랐다. 그러나 서울의 기온은 여전히 높아 예보와는 달리 밤새도록 비만 내리다 사흘 째 날이 밝아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라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봤다. 겨울비가 소리 없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기온은 영상2도란다. 우산을 받고 나가서 동네 공원길을 산책했다.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건강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소나무의 푸른 잎과 키다리 메타세콰이어의 누런색 잎, 말랐다 다시 젖은 잎들을 달고 있는 중간키의 정원수들이 어울려 겨울비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는 소리의 화음이 경쾌하게 들렸다. 그러는 사이 조용히 내리던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눈송이들과 섞여 내리기 시작했고 간혹 눈만 펑펑 쏟아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조용히 내리는 겨울비와 사뿐사뿐 내리는 눈, 그리고 그 둘이 섞인 진눈깨비가 빚어내는 한겨울 아침의 역동적 풍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울을 북풍 몰아치는 눈 덮인 풍경으로만 연상한다. 그런 얼어붙은 풍경에선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아침의 정경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동영상 이었다. 한겨울의 차디 찬 사물들이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이처럼 따스함이 스민 움직임이 느껴진다. 우산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눈송이와 빗방울들이 춤추는 공원길을 나도 콧노래로 장단 맞추며 걸었다. 한겨울의 흥겨운 아침 한때였다. < 2023년1월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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