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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가 찾아 준 童心

사진 소묘

by 솔 뫼 2024. 1. 1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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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붓는 눈맞으며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도
토끼몰고 꿩을 쫓았던 고향의 추억에 젖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다. 나풀거리며 내리는 눈송이를 잡으려고 사방으로 내달리는 손녀의 해맑은 웃음소리도 하얗게 느껴진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눈송이가 굵어지더니 순식간에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그리고 폭설로 변해 온종일 쏟아졌다. 좀처럼 많은 눈이 내리지 않는 서울이지만 그날의 눈은 모처럼만에 온 큰 눈이었다. 기상청에서도 이날 서울의 적설량이 12cm라고 했다. 유치원애 다니는 7살짜리 손녀에겐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없었다. 달리고 소리 지르다 싫증이 나면 손녀는 어느새 눈사람 만들기에 빠져들었다.
 


지난해 12월30일 근래 보기 드물게 온종일 많은 눈이 내렸다. 그 바람에 나는 서울 생활 55년 만에 처음으로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건 아득한 세월 저 너머에서나 맛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그날 큰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결코 맛 볼 수 없었던 일들이기도 했다. 발목이 덮일 만큼 내려 쌓인 눈밭을 어린아이처럼 뛰고 미끄러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싸움을 했고 눈덩이도 커다랗게  굴렸다. 75세를 넘긴 할아버지는 손녀와 함께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헤매고 있었다.
 


이날 세차게 퍼붓는 눈 속에서 내가 오랜만에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된 건 딸의 이사 때문이었다. 그날 딸은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 동네로 이사를 왔다. 성탄절 직전 영하 10도 이하의 맹추위가 사흘간 몰아쳤었지만 그 후론 포근하고 맑던 날씨가 이날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눈이 많이 내리면 이사하는 딸은 불편하겠지만 어린이들에겐 최고로 신나는 일이다. 그날 손녀는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내가 이사하는 딸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손녀를 데리고 재미있게 놀아주는 것뿐이었다.
 


손녀에게 장갑과 모자, 따뜻한 외투를 입히고 우산까지 챙겨서 눈밭으로 나갔다. 아파트단지 안 길과 널찍한 어린이 놀이터엔 몰려나온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눈싸움하고, 눈사람 만들고, 어른들이 끌어주는 눈썰매 탄 아이들이 어우러진 눈놀이 축제장이었다. 우리도 그 속으로 들어가 함께 어울렸다. 손녀는 거기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노느라 신이 났다. 손녀는 커다란 3단짜리 눈사람을 만들자고 했다. 함께 나온 집사람까지 손녀를 위해 눈사람 만들기에 나섰다. 크고 작은 눈덩이 세 개를 만들어 차곡차곡 얹어 세우니 손녀 키와 비슷해졌다.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와 잎을 주어서 얼굴 모습도 만들었다. 신이 난 손녀의 재촉으로 우리는 눈사람을 하나 더 만들었다. 하루에 눈사람을 두 개 만들기는 처음이다. 좋아하는 손녀의 모습에서 내 어린 날의 추억들이 어른거렸다.
 


내 고향은 남쪽이어서 겨울에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간혹 많은 눈이 내리면 우리들은 산으로 들로 맘껏 돌아다녔다. 눈싸움도 했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비탈진 골목길에 쌓인 눈을 밟아서 매끄럽게 다진 후 썰매나 대나무로 만든 스키를 타며 놀았다. 그러다가 길을 미끄럽게 한다고 어른돌에게 혼도 나곤 했었다. 그렇지만 동네의 형들을 따라 눈 내린 동네 앞산을 헤매며 토끼몰이를 하거나 꿩을 쫓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그러다 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토끼와 꿩을 잡기도 했다. 형들은 바위 아래나 수풀 속에 숨어있는 토끼를 쉽게 발견해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달아나는 토끼를 사방에서 몰아 몇 마리 잡는 행운을 누린다.
 


다만 꿩은 날아가거나 두 발로 무척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맨손으로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또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나뭇가지나 마른 풀 속에 숨어 있어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눈이 내리는 날엔 꿩은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조금만 날아올랐다가 멀리 못 가고 곧바로 하얀 눈밭에 처박히듯 내려앉곤 한다. 형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사방이 하얗게 된 바람에 꿩이 방향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는 7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억세게 운수 좋으면  눈위에 내려앉는 꿩도 잡을 수 있다지만 나는 그렇게 잡히는 꿩을 본 적은 없다. 그저 날아가는 꿩만 쳐다봤을 뿐이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추위도 잊고 형들이 시키면 들판이나 산골짜기를 이리 뛰고 저리 내달렸던 그 시절이 그저 눈물겹게 그리워질 뿐이다. 계속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 사이로 보이는 해맑은 손녀의 미소에서 나의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해 볼 뿐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이미 70년 가까운 먼 옛적의 일들임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추위가 느껴졌다. 더 놀겠다는 손녀를 달래서 집으로 들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눈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눈은 새해 들어서도 두 세차례 내렸지만 그날처럼 즐거운 일들을 만들지는 못했다.
 

 

< 2024년1월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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