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함께 새하안 눈길을 걸었다. 그냥 좋다는 느낌으로만 걸었다. 별다른 말이나 행동은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퍼붓는 눈을 구경하며 걸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땅, 강물까지 온통 하얗다. 색깔이 있는 것들은 공원과 주변 산의 수목들뿐이다. 눈송이 사이로 보이는 좌우에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나 건물들도 희뿌옇게 보일 뿐 저마다 가졌던 본래의 색깔을 잃었다. 우리도 그렇게 잡다한 생각들을 버리고 순수하게 하얀 마음으로만 걸었다.
새해 벽두인 1월17일 서울엔 많은 눈이 내렸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것보다 훨씬 많이 내렸다. 오전 10시를 지나면서부터 눈발들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렸다. 땅에도, 나무 위에도 쉴새 없이 쌓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삼라만상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얗게 바꾸어 놓고 말았다. 처음 보는 눈도 아닌데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 왠지 즐거워짐은 무슨 까닭일까? 80살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이 나이에도 아직 눈 오는 날을 좋아 할 동심이 남았다는 뜻일까?
절친과 나는 점심 식사를 빨리 마치고 밖으로 내달렸다. 두툼한 옷차림에다 우산을 쓰고 비탈진 길을 따라 가까운 한강 둔치로 갔다. 눈이 쌓인 길은 매우 미끄러웠지만 눈 내리는 한강의 모습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듯한 걸음으로 20여 분에 걸친 노력끝에 우리는 눈이 펑펑 내리는 강가의 공원에 도착했다. 막힌 것 없이 탁 트인 둔치엔 은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부끼며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자기를 보아달라는 듯 사락사락 소리 내며 우리의 우산 위에 내려앉았다. 눈송이 사이로 보이는 나무나 강 건너편 집과 아파트들도 하얀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원의 나무들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모든 게 하얗다.
우리가 나온 곳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서울숲과 응봉산 부근 이었다. 이 일대는 봄철의 응봉산 개나리부터 가을의 금호산 낙엽까지 한강을 끼고 아름답게 펼쳐지는 절경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한강의 풍경을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말끔히 정비된 둔치의 공원길에 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우리는 걸었다. 앞서 지나간 발자국들은 조금 보였지만 주위에 사람들은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가는 우리 모습을 남들이 본다면 무척이나 다정한 한 쌍으로 각인될 것 같았다.
가끔 스냅 사진도 찍었고 주변 설경도 카메라에 담으며 우리는 중랑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넜다. 보행자와 자전거를 위한 다리다. 다리를 건너니 강변북로의 거대한 고가도로가 머리 위를 지난다.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면 한강과 중랑천을 좌우에 둔 널찍한 공터가 펼쳐진다. 그 빈터 가운데 있는 팔각정은 전망이 정말 좋다. 정자에 앉으면 서울지하철 3호선이 지나는 동호대교 철교가 정면으로 보인다. 맑은 날엔 파란 강물이 호수처럼 예뻐 예부터 동호(東湖)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렇지만 이날은 백색의 호수가 한없이 내리는 눈송이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길 가에 누군가가 만들어 둔 꼬마눈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그 정자에 올라 널찍한 빈터와 정자의 주인인 양 설경을 즐겨보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그 정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를 보자 반가워서 그랬는 진 모르지만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걸더니 자신의 살아온 얘기들을 청산유수로 들려주는 게 아닌가. 이 고장에서 50년을 살며 동생들을 잘 키운 5형제의 맏이란다. 강원도가 고항인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우리 둘만의 조용한 시간은 뺏겼지만 같은 시기를 살아온 그의 애환에 맞장구를 맘껏 쳐주었다. 그의 이야기 중 몇 가지는 나하고도 상당히 유사했었기 때문이다. 30여 년의 공직생활 덕에 지금의 형편은 여유롭다지만 얼굴 표정에는 어딘가 외로움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남겨두고 한강을 끼고 걷다 바로 옆에 있는 데크 로드로 올라갔다. 서울숲 출입로인 이 길은 똑바로 매우 길게 이어지는데 성수대교 북단 강변북로 8차선 위를 지날 땐 무척 시끄럽다. 그렇지만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았다. 한강과 응봉, 성수대교와 울창한 소나무 숲 등 주변의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지나간 날들에 있었던 아름다웠거나 아쉬웠던 추억들도 함께 생각하며 걸었다. 말없이 주고받는 눈길과 가벼운 몸짓 속에 그런 내용들이 담겼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짓이 더 많은 뜻을 담는다고 한 말이 실감 났다.
긴 데크 로드가 끝나는 곳엔 사슴들 방목장이 있다. 하얗게 쌓인 눈밭에서 몇 마리의 사슴들이 구유에 있는 사료들을 먹고 있었다. 또 그 옆 눈밭엔 우두커니 서 있는 놈도 있었다. 다리를 통과해 사슴 우리 앞에 오니 10여 마리의 사슴들이 눈 맞지 않는 데크 로드 아래 길게 늘어서 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좀체 보기 드문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1000여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의 색다른 모습을 보며 서울숲으로 넘어갔다. 눈은 계속 내리고 밟히는 눈 소리는 인적 드문 공원의 하늘로 퍼져갔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연이 들려주는 경쾌한 멜로디였다. 넓디넓은 서울숲엔 우리처럼 설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눈사람을 만들거나 사진을 찍거나 눈 싸움하는아이들도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걷는 우리도 덩달아 즐거웠다. 퍼붓던 눈발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아무런 재주 없는 내 곁에서 긴 세월 이렇게 함께 걸어준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切親이자 짝궁, 나는 그 곁에 바짝 붙어 지하철로 향했다.
< 2024년1월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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