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피고 지는 梨花女大에 데모하러 갔다가 만난 이대생, 열아홉 살 이대생이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러나 노래 가사와 달리 최근 다시 찾은 이화여대에 배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갓 피어난 분홍빛 진달래 몇 송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렇지만 노랫말에 나오는 것처럼 발랄하고 표정이 밝은 열아홉 살 여대생들은 여전히 화사한 햇살 아래 예쁘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글 머리에 인용한 구절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독재 정권에 항거해 민주화와 학원 자유화를 외치며 우리들이 데모할 때 자주 불렀던 노래다. 이미자씨의 히트곡 ‘섬마을 선생’의 곡에다 가사만 바꿔 불렀다. 큰길에까지 나가 시위를 하다 진압경찰에 밀리거나 쫓기면 우리들은 이웃 이화여대 후분을 통해 캠퍼스로 몰려가곤 했었다. 우리는 그 대학 강당의 넓고 경사진 계단에 대형 태극기를 펼쳐두고 시위를 계속하곤 했다. 경찰들이 여자대학 캠퍼스 안으로는 쫓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추억들이 어제 같은 데 우리들은 이미 70대 중반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봄을 시샘해 계속 되던 궂은 날씨가 모처럼 활짝 개었던 3월13일 학창시절 같은 서어클에서 함께 토론하고 시위에 앞장섰던 선후배들 넷이 뭉쳤다. 오전10시쯤 이화여대 정문앞에서 만난 일행은 반세기 저편의 추억들을 더듬으며 여자대학 캠퍼스 트레킹을 시작했다. 경의선 철길 위로 난 돌다리를 지나서 들어갔던 당시의 교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촌역으로 들어가는 철로의 넓은 구간을 좌우로 길게 복개 한 데다 별로 넓진 않았던 그 때의 운동장마저 지하화해 이화캠퍼스 복합단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1935년에 건립된 녹색 지붕의 본관과 대학원관 등 몇몇 건물은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화여대에서 첫 번째 지어진 본관은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미국인 파이퍼 여사가 기증한 돈으로 지어 파이펴 홀로 명명됐으며 우리나라 첫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상징적 건물이 됐다. 음악과 전용으로 지었던 대학원관 역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까지 갖춘 4층 석조건물이다. 원래는 함석지붕의 3층이었지만 1948년에 4층으로 증축됐다. 대강당이 세워진 후에는 중강당으로 불린다.
지하화 한 복합단지 주변을 끼고 도는 길을 따라 우리는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대학본관을 중심으로 이대 초대총장 김활란박사, 본관에서 길건너 오른쪽엔 대학설립자 메리 F. 스크랜튼 여사의 동상이 있어 개회기와 일제강점기 등 어렵고 암흑했던 시절 용감하게 여성교육에 앞장선 분들의 높은 뜻을 새겨볼 수가 있었다.
스크랜튼 여사가 1886년 여학생 1명으로 시작하고 고종이 다음 해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내려준 것이 梨大의 시작임은 국사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을 지냈던 김활란박사는 1946년 종합대학 승격 후 이화여대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스크랜튼 여사 동상을 지나 수목이 울창한 길을 조금 더 가니 날렵하고 멋진 한식 단층 기와집이 나무들 사이 보였다. 1936년에 지은 가사실습소가 6.25때 불타자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아령당이다. 이 이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부인 알령왕비 이름에서 딴 것이란다. 그 밖에도 유서 깊고 멋진 건물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곳을 지나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아령당 못지않게 예쁘고 규모가 큰 한식 기와집이 있다. 이화여대의 어제와 오늘이 담긴 ‘이화역사관’인데 아쉽게도 우리는 내부를 보지 못했다. 역사관 바로 옆 야트막한 언덕의 공터에 굵은 통나무 24개가 시계처럼 둥그렇게 박혀 있었다. 김옥길총장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했던 ‘숲속의 기도실’ 팔복동산 이다.
오늘 우리가 지나온 길과 건물들은 데모하다 쫓겨 들어왔던 몇 번을 빼곤 들어와 본 적이 없었던 구역에 있다. 그 후에도 나는 고작해야 이대 후문에서 대강당을 지나 정문까지의 코스만 한두 차례 지나갔을 뿐이다. 바로 옆의 학교에서 4년간을 다녔던 우리들이지만 이곳이 이국처럼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여자대학 캠퍼스 안쪽의 속살을 구석구석 누비며 다니자니 신천지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남녀공학 학교 풍경과 다른 것도 없는데 말이다. 길도 평탄한 데다 여성교육의 유서 깊은 현장들을 둘러볼 수 있고 경치까지 좋은 코스였다. 재학 당시에도 ‘엄격한 금남구역’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멋진 데이트 길을 몰랐을까? 꿈 많고 용기 충천했던 그 시절에 여기를 자주 드나들었다면 정말 배꽃처럼 소박하고 예쁜 여대생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안은 채 계속 걸었다.
기도실 언덕을 내려오면 아현동과 중앙여고 등 서울 시내를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봉원사 쪽으로 가는 2차선 도로다. 나무들도 별로 없는 안산자락의 능선이어서 남산까지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다. 일행 중 이곳이 고향인 분의 얘기로는 이 지역을 어렸을 적엔 ‘능안’이라 불렀단다. 이는 세손으로 봉해졌지만 일찍 죽은 정조의 형 '의소'의 묘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 묘는 1871년 의령원으로 승격됐었고 1949년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그 길을 약 10분쯤 걸어 이화여대 기숙사와 산학협력관 건물을 지나면 봉원동 주택가를 지나게 된다. 독립문 네거리에서 연세대로 가는 금화터널 위쪽 지점의 안산 능선이다. 작고 낡은 한식 가옥들이 있는 마을 길을 10분쯤 걸으면 봉원사 경내로 들어간다.
우리들은 봉원사 바로 옆 학교에서 젊음을 불태웠지만 이 절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졸업 후 안산을 산행하다 두어 차례 거쳐 갔을 뿐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성여왕3년(889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 절의 이름은 반야사였다.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는 창건 당시엔 연세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덕에 불교탄압에 따른 화를 면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후 복원됐다. 그리고 영조24년(1748년) 새 땅을 하사받아 이 곳에 이전하며 영조가 봉원사 현판도 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호의 지도에도 새로 지은 절이란 뜻의 新寺로 기록돼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6.25때 대부분이 소실된 탓에 1966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대웅전은 1991년 다시 화재로 전소돼 1994년에 복원했다.
지금은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이 절엔 잘 알려지지 않은 귀한 유물과 유적, 글씨들이 많이 있다. 개화파 스님 이동인(李東仁)이 5년간 머물며 갑신정변(1884년)의 주역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을 가르쳤는데 그 기념비가 이곳에 있다. 또 우리 말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던 주시경(周時經)선생은 1908년8월31일 이 절에서 한글학회의 전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는데 칠성각 앞 그 터에 2008년8월31일 세운 기념비석이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우리나라 대표적 서예가이며 동국전체 완성자인 이광사(李匡師), 명부전 편액은 정도전(鄭道傳)의 글씨다.
특히 절마당 동편에 있는 大房 건물에는 추사가 쓴 현액 2개와 추사의 스승 옹방강이 쓴 현액 한 개가 있다. 추사 김정희의 현액에는 청연시경(靑蓮詩境), 산호벽수(珊糊碧樹)가, 스승의 현액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씌어있다. 또 함께 걸려있는 '奉元寺'현판은 영조의 친필이 6.25때 불타 박석봉 스님이 새로 쓴 글이다. 그런데 김정희와 옹방강의 귀한 글이 이 곳에 오게 된 경위가 재미있었다. 이 글들은 권좌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말년을 보냈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있었다. 그 아소정을 봉원사에서 1966년 매입해 이곳에 옮겨 변경개축한 건물이 이 大房인데 그때 다른 재목속에 딸려왔다고 한다. 대방 근처에 있는 범종도 웃지 못할 기막힌 사연이 있다. '영조36년 제작' 표시가 동체에 있는 이 종은 충남 예산의 가야사에 있었는데 옮겨 온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가야사는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전하기 위해 불태워버린 절이다. 대원군은 이 절의 석탑 자리가 2대에 걸쳐 天子가 나올 길지란 말을 믿었다고 한다. 결국 연천에 있던 남연군 묘는 이 불태운 절의 석탑 자리로 이장됐다. 그 영험인지 고종과 순종은 왕좌에 앉았다. 그냥 무심히 지나치며 보았던 절에서 뜻밖의 귀한 보물과 역사적 발자취들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봉원사 위쪽 숲길은 무악정 부근의 안산 자락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조금 걷다가 연세대 경계철책의 문을 통해 연세대 캠퍼스로 들어갔다. 현재의 연세대 부지는 1917년9월 언더우드가 기부한 돈으로 신촌 일대 19만평 부지를 산 것에다 후에 추가대 형성됐다. 연세대 대학본부인 언더우드관은 창립자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의 형 존 티 언더우드가 기부한 10만 달러로 1924년에 완공한 대학의 중심건물이다. 그 외에도 캠퍼스 안에는 수많은 유서깊은 건물들이 있다.
우리 일행은 연세숲의 명당 聽松臺에 먼저 들렸다. 50여 년 전에 비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울창한 숲속의 쉼터로 동문과 재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청송대는 '소나무들의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이지만 집이나 정자는 없다.우리는 이곳에서 미팅도 했고 사색도 했으며 심지어 반입금지된 술까지 갖고 와서 마시며 젊음을 불태웠고 낭만을 즐겼었다. 일행은 재학시절의 추억들을 더듬으며 강의실이 있던 건물들과 본관앞 언더우드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 우리들의 동아리 사무실이 있었던 본관 지하1층의 방, 그리고 설립자 언더우드 생가 등 캠퍼스 곳곳을 둘러본 후 백양로 지하에 조성된 중앙광장에서 걷기를 마쳤다. 약30만 평이나 되는 대학 캠퍼스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역사적 유물과 유적, 유서 깊은 건물들을 두루 둘러보기엔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교문을 나와 신촌시장 근처의 오래된 맛집에서 맛있는 갈비로 늦은 점심을 즐겼다. 물론 약간의 반주도 빼놓지 않았다. '추억은 아름다와라'를 되뇌이면서.
< 2024년3월16일 >
듣기 싫고 보기 싫은 것 물리치기 (0) | 2024.04.20 |
---|---|
단톡방 사람들의 외침들 (0) | 2024.03.28 |
엉뚱하고 황당하고 별난 금표(禁標) (1) | 2024.02.08 |
조촐한, 아주 조촐한 가족송년회 (0) | 2023.12.29 |
까치밥으로 하나 남은 꼭대기 감 (1) | 2023.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