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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에 쓴 근로계약서

단상

by 솔 뫼 2025. 1. 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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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백수생활에 새 활력소 찾고 싶어

 

 

 
허구한 날 거의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술 추렴이나 하며 지낸 지 몇년이 되었던가? 대낮부터 만나 별로 실속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들만 나누며 소일하다 밤이 되어서야 귀가한 날들 또한 일상이 된 지도 몇 해째 이던가?. 신체는 건강하지만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작취미성 상태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만 하며 내일도 그렇게 지낼 것인가?
 
그럴 순 없기에 나는 상당히 엉뚱하고 도전적 결단을 하나 내렸다. 큰 맘 먹고 80살을 지척에 둔 나이에 생뚱맞게 근로계약서를 썼다. 그 얘기를 들은 아내와 집에 들렸던 작은 딸은 그날 저녁 식사 때 한 잔의 술로 나의 재취업(?)을 축하 해주었다. 맥주 한 두 잔만 곁들인 조촐한 의례였지만 오랜 기간 백수로 지내던 나에게 그 의미는 결코 적다고 할 순 없다. 내 나이 올해 만76세. 가장 마지막 직장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7년이나 지났다.
 
내가 고용계약서 또는 근로계약서를 쓴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만25세에 시작한 첫 직장 중앙일보에서 30년 근무 후 퇴직과 동시에 옮겨간 두 번째 직장 국정홍보처 입사 때와 세 번째 마지막 직장 언론중재위원회 입사 때 뿐이었다.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백수로 보냈었다. 되돌아보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첫 직장을 떠나야 했으니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마지막 기간 중 약 15년 이상을 연금생활 은퇴자로 지낸 셈이었다. 그 긴 세월을 그냥 흘려보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삶의 큰 손실이란 생각이 가슴을 때린다.
 
제대로 된 노후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백수가 되는 바람에 처자식 고생시키며 긴 세월을 보내온 나였다. 그렇기에 며칠 전에 쓴 근로계약서는 누가 뭐래도 내겐 적잖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로시간의 길고 짧음이나 근무 조건의 난이도는 물론 반대 급부의 다과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노인이긴 하지만 아직 체력이 튼튼하다. 그렇기에 일이든 봉사활동이든 무언가를 하며 생활의 활력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보다가 이번 일을 맡게 됐다.
 


그 일은 2월부터 시작된다. 대한노인회 성동구지부가 서울교통공사의 지원을 받아 하는 노인역량활용사업 중 ‘시니어 승강기안전단’에서 일을 한다. 봉사활동의 성격을 띠지만 유급 근무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잠시 업무 성격과 근무형태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왕십리역은 2호선, 5호선, 경의-중앙선, 분당선 등 4개 철로가 통과하는 크고 복잡한 환승역이다. 그 중 5호선엔 25명의 노인들이 아침반, 낮반, 저녁반 등 3개 조로 나뉘어 안전 지킴이 일을 한다. 모두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지만 내가 속한 조는 오후3시부터 6시까지 근무한다. 모든 공휴일은 유급 휴무이고 근무 기간은 올해 11월말까지 10개월이다. 매년 12월에 다음 해 일할 사람을 선발하는데 나처럼 올해 새로 들어온 사람은 둘뿐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나오다 지난해도 일했다는 한 사람이 나에게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는데 잘 들어 오셨다.”며 축하해주었다, 그 말에 담긴 뜻은 좋게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2023년12월에도 일하고 있는 사람의 제보를 받고 신청했었지만 실패했었다. 올해도 또 일하게 된 그는 옛 시절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이 일을 맡게 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낮 시간의 음주는 불가능해졌고 저녁 모임 참석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기회가 일하는 즐거움에다 금주에 따른 건강까지 덤으로 챙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없을 때는 새 다리도 크지만 배부를 땐 소 다리도 작아 보인다’는 말로 대신하련다. 그래도 수고비를 잘 저축하면 두해 뒤엔 결혼 50주년 금혼식 기념 해외 크루즈 관광비용 마련도 가능할 것 같다는 꿈까지 꿔 본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허허허!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바로 근처 서울숲 너머 서쪽 하늘에는 저녁 해가 짙은 미세먼지를 뚫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  2025년1월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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